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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비 10% 로비에 … “세금으로 심사위원 배 불려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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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국민의 세금으로 턴키 심사위원들 배 불리는 일을 한다는 자괴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A건설사 턴키 담당 영업부장 K씨는 회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일(턴키 입찰 로비)을 하고 있지만 이제 지긋지긋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현행 턴키 입찰제도가 부조리와 부패를 키워 국가를 멍들게 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매년 10조원 이상의 국가예산이 들어가는 분야에서의 폐해는 어제오늘 지적된 게 아니다. B건설 전직 임원인 K씨는 “자동차나 조선·전자 업종에서 국내 기술이 세계 초일류 수준으로 올라섰는데 유독 건설 분야만 뒤처진 것은 뿌리 깊은 비리 사슬이 큰 이유”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 낭비다. C건설사 L상무는 “심사위원 후보들 밥 사고 술 사는 비용이 다 어디에서 나오겠느냐”고 반문했다. 건설사는 이익을 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니만큼 공사비에 로비 비용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로비 비용 외에 로비에 소요되는 인건비까지 포함하면 전체 공사비의 10% 이상이 낭비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공사비를 넉넉하게 타 내기 위한 업체 간 담합도 적지 않다. 수익성이 좋은 프로젝트를 놓고는 사활을 걸고 경쟁하지만 그렇지 않은 공사는 ‘나눠 먹기’를 한다는 것이다. 최소 두 개 컨소시엄이 입찰해야 하는 규정상 한 곳은 ‘들러리’를 서고 다른 업체들은 밀어 주는 식이다.

부실평가 지적도 나온다. 현 제도에서는 심의 당일 선정된 심사위원 10~15명이 모여 통상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심사를 한다. 발주처에서 작성한 설계검토서와 설계심의토론회 내용을 토대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식사 시간 등을 제외한 실질적인 심사 시간은 5시간 정도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전체 프로젝트를 평가하는 데 따른 전문성 결여도 자주 지적된다. 최근 한 건설사의 입찰 로비를 폭로한 L교수는 “내 전공과 무관한 분야까지 점수를 매기라는 건 잘못된 평가 방식 아니냐”고 말했다.

대형 업체에만 유리한 제도라는 비난도 많다. 중견 E건설사 사장은 “우리 같은 업체에 턴키 공사는 그림의 떡”이라고 말했다. 심사위원 후보군을 ‘상시 관리’하는 데 워낙 많은 인력과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대형 업체가 아니면 턴키 시장에 발을 담그기 어렵다는 얘기다. 대한건설협회 조사에 따르면 올 들어 6월까지 발주된 턴키 공사 8조368억원어치 중 시공능력 상위 10개 사가 수주한 공사는 금액 기준으로 77%다.

국내에 턴키 방식이 도입된 것은 1995년 정부가 건설기술 개발 및 관리 등에 관한 운영 규정을 제정하면서부터다. 이후 공정성 논란이 불거지면서 20여 차례에 걸쳐 제도를 바꿨다. 심사위원 후보군에서 무작위로 심사위원을 뽑아 시공 업체를 선정하게 하는 방식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국토해양부는 지난달 개선안을 또 내놨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턴키 심사를 전담하는 분과위원회(50~70명)를 운영하겠다는 게 뼈대다. 하지만 아직도 세계표준과 차이가 나는 게 많다. GS건설경제연구소 이상호 소장은 “프로젝트와 관계없는 교수들이 시공업체를 선정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

싱가포르에서는 발주처 소속 전문가 집단이 시공업체 선정부터 사후 관리까지 모든 것을 맡는다. 싱가포르 육상교통청 림복남 부청장은 “가장 효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는 시공업체를 선정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말했다. 이 나라에서 입찰 비리는 상상조차 어렵다. 혹독한 처벌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영국의 공공공사 발주자들은 “건설업 비리는 곧 발주자 비리”라는 경구를 자주 사용한다. 공공 공사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발주자 스스로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의지다. 발주자에게 권한을 주되 결과에 책임을 묻는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다. 미국은 발주기관별로 공사 제안서를 평가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한 후 기술제안서는 심사위원이 자신의 전문 분야별로 평가한다.

국토연구원 건설경제 전략센터 김성일 센터장은 “턴키 심사는 사명감이 없으면 하기 힘든 업무”라며 “공무원 신분의 심사위원들로 이뤄진 상설 심사위원회를 만들어 결과에 대해 철저히 책임지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민권익위원회 곽형석 부패영향분석과장은 “2002년부터 턴키 심사를 전담하는 상설심위위원회를 신설하라고 정부에 권고했지만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다”며 “최대한 빨리 관련 법령을 개선해 입찰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함종선 기자

◆턴키(Turn-Key)=한 업체가 설계부터 시공까지 모든 공정을 맡아 처리하는 공사 발주 방식. 주로 300억원 이상의 큰 공사가 이 방식으로 발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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