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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다사다난조차 사치였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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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세기말을 한해 남기고 1998년이 저문다.

거쳐온 길을 돌아보면 "다사다난 (多事多難) 한 한해였다" 는 말이 올해만큼 실감나는 해도 없다.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에 사슬이 묶인 채 15대 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근세사에 한 (恨) 으로 얼룩진 호남땅에도 본격적인 햇볕이 들었다.

북한은 선대의 유훈통치시대를 마감하고 김정일 (金正日) 체제의 출범을 과시하듯 돌연 로켓 발사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국가생존의 배수진은 군사대국의 입지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과시한 셈이다.

궁극적으로 경제가 밥을 먹여주긴 하지만 한해가 경제지표에만 매달려 온통 경제문제로 홍역을 치렀다.

경제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극단의 조치로 기업의 구조조정과 빅딜은 해를 넘겨도 더욱 목줄을 죌 것이고 그 결과는 실업의 양산 (量産) 이란 악순환과 맞물려 있다.

동서 이념의 붕괴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이 파고 (波高) 를 드높여 세계는 바야흐로 경쟁력있는 경제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결투장이 되고 말았다.

부존자원이 없고 인구가 과밀한 분단국가 남한은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 했던 한해였다.

공장이 속속 문을 닫거나 생산라인을 축소하자 노사협의도 공염불이고 직장마다 퇴출이 강제됐다.

대량실업으로 길거리에 내몰린 가장 중에 소점포나 노점상을 차릴 형편도 못되는 이는 노숙자로 전락해 구호기관의 찬밥신세로 끼니를 연명해야 했다.

삶의 마지막 보금자리인 가정의 파산,가족의 해체야말로 총성없는 전쟁과 다를 바 아니었다.

6.25전쟁 시절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 군상을 서울역이나 서소문에서 흔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참으로 힘들고 고달픈 한해였다.

우리보다 형편이 더 나쁜 북한의 참상이 상대적으로 위무가 되기에는 그 처절함이 너무 우리의 가슴을 찌른다.

그래도 그 짐마저 떠안겠다는 새 정부의 '햇볕정책' 이 소떼의 휴전선 넘기와 금강산관광으로 이어졌다.

북한에 대한 남한의 손길은 한달 굶은 어미가 영양실조로 앓는 자식에게 빈 젖을 물리는 듯한 애잔한 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국민의 땀과 고통, 눈물을 강요하며 출범한 새 정부는 건국 50년 만에 처음 잡은 정권의 호기를 놓칠세라 장검을 뽑아 소백산맥을 넘으며 서풍을 일으키고, 국회는 국민의 땀과 고통과 눈물에 아랑곳없이 당리당략으로 혈세만 축내는 출법 (出法) 기관 노릇에 충실했다.

세모 (歲暮) 면 몇 차례 칼바람 매서운 한파도 있게 마련인데 올해는 추위다운 추위가 없었다.

쌀 두 가마에 연탄 한 차 들여놓고 김장독 묻으면 올 겨울은 고대광실 부자가 부러울 것 없다던 한 시절 어머니 말씀처럼, 강추위 없는 겨울은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된다.

초봄인듯 훈기를 띤 날씨처럼 12월로 들어서자 무역흑자 4백억달러 돌파란 환란극복의 청신호가 들리고 제반 경제지표가 회생의 문턱을 넘어섰다는 희소식이 망나니 자식 철들듯 반갑다.

이 대목에선 시우쇠로 보검 만들기 한 평생, 고난의 현대사를 헤쳐온 '준비된 대통령' 의 노고도 새겨야 하리라. 하지만 얼음 언 땅을 녹이며 쏟아지는 샘물처럼 세밑에 곳곳에서 가슴 훈훈하게 적시는 온정의 미담에서 보듯 묵묵히 고통을 이기는 슬기에 단련된 민초의 저력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 근세사 1백년 동안 우리는 조선조 말의 민란과 국력쇠잔, 일제 강점기, 분단과 이산, 전쟁, 군사정권을 거쳐오며 굴욕.가난.독재의 애옥살이로 어느 민족보다 담금질당해 왔다.

그것은 한국인이 잡초 근성대로 생명력이 그만큼 강한 이치다.

세모의 겨울 한 가운데 서서 미래를 내다본다.

헐벗은 수목은 봄이 오면 잎과 꽃을 다시 피우겠지만 인간사 세상살이의 앞날은 그렇게 밝지 않다.

미래는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더 종속시켜 황금만능의 물질욕구만 부추길 것이란 전망이다.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가속돼 '2 (富) 대 8 (貧)' 로 양극화될 계급구조 속에 중산층 몰락이 필연적이다.

세기말의 마지막 한해인 1999년, 우리는 무엇에 희망을 걸어야 할까.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생명공학의 발전이나 비아그라 선풍이 '고개 숙인 남성' 의 열광적 환호를 받았지만 그것은 희망이 아닌 과학만능이 창출한 절망의 한 부분이다.

박세리나 박찬호의 개인적 성취는 순간적인 미약 (媚藥) 일 뿐 우리 공동체의 희망이 아니다.

소박하게, 선인들의 고언대로 '분수를 알아 절제하며 마음을 맑게 가져 청빈의 도리를 익히는 방법' 에 희망을 걸어 본다.

희망은 누가 무엇을 나에게 가져다주는 요행이 아니라 희망의 에너지를 내 심저 (心底)에서 창출하는 데 있다.

올려다보면 허방을 딛기도 하지만 내려다보면 땅을 터삼아 온갖 풀이 꽃을 피우고 미물들이 제몫만큼 열심히 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새해엔 느긋한 걸음으로 내 심지 (心志) 를 연마해 보자.

소설가 김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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