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칼럼]1999년의 세가지 當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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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파도는 높고 날씨는 추운, 우리가 지금 건너고 있는 시간의 해역 (海域) 을 대강 싸잡아 거기에다 1999년이라고 이름을 붙이자. 역경 (易經) 의 '고 (蠱)' 괘의 괘사 (卦辭)에는 '선갑삼일 후갑삼일 (先甲三日 後甲三日 : 갑의 날 전 사흘, 후 사흘)' 이란 말이 들어 있다.

1999년도 반드시 한해가 아닐 수도 있다.

그 앞 3년과 그 뒤 3년, 그래서 전후 (前後) 7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길이의 부정 (不定) 은 1999년이 주는 첫번째 당혹 (當惑) 이다.

둘째 것은 이 기간이 시련 (試鍊) 의 시기란 점이다.

시련이란 말 대신에 변화 혹은 개혁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역경의 蠱괘와 조지프 슘페터 (1883~1950) 의 '창조적 파괴' 는 비슷한 뜻이다.

한 동안 잘 나가던 질서가 다름 아니라 잘 나갔기 때문에 벌레가 우글우글하게 돼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蠱다.

슘페터의 파괴도 실패가 아니라 성공 때문에 초래된다.

불황은 호황 때문에,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닌 성공 때문에 온다.

자본주의가 성공하면 주인은 소용이 없다면서 관료적 관리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라고 그는 보았다.

이 파괴의 결과가 창조가 아닌 다른 파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1999년이 주는 세번째 당혹이다.

물론 1999년은 전세계에 똑같이 오지만 나라와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오는 몫도 있다.

그리고 경제.정치.문화를 망라해 인간공동체의 모든 영역을 똑같이 때리지만 영역에 따라 가외의 일격이 따로 있기도 한다.

남한 경제와 관련해 이 파괴의 힘은 먼저 공급측면에 나타난 비효율성의 초점인 원화를 가격했다.

원화의 가치는 풍선처럼 부풀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그 한방에 터진 것은 공급이 아니라 수요였다.

특히 투자수요는 원화가치보다 더 떨어졌다.

1999년의 파괴는 이런 식이다.

전세계적으로 이 파괴는 자본주의 세계의 성공 때문에 온다.

정보화.세계화는 1999년과 부분적으로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 파괴가 창조하는 어떤 새 질서가 1999년의 다음에 올까. 길게는 2000년이라는 새 천년기 (千年紀) , 좀 짧게는 21세기라는 새 세기 (世紀)가 온다.

그러나 천년은 물론이고 백년조차 그 특성을 지금 헤아려 알 수는 없다.

더 짧게는 10년간이 있다.

'정보화.세계화된 번영의 10년' 이라고 불릴 것인가.

지금 세계경제의 수요가 무너지고 있는 징후는 여기 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주식시장의 활황으로 소비수요와 고용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도 이 파괴력의 희생이 될 날은 빨리 오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이 주식값을 천장에 매어 두려고 금리를 더 내릴 수 있는 횟수는 그 효력을 생각할 때 바닥이 드러나 있다.

세계에서 수요가 살아 있는 유일한 시장인 미국의 수요가 줄어들면 온 세계가 수요부족에 빠진다.

이에 대비해 온 세계의 대기업들은 합종연횡 (合縱連衡) 이 한창이다.

지금 남한에서 살아 있는 수요라곤 수출밖에 없다.

그런 수출이 전세계적 수요 디플레이션을 맞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원화가 다시 올라가고 있다.

불행하게도 지금 남한에는 물가.환율.이자율.임금률 등 경제 패러미터가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不一致) 를 해소할 수 있도록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제공자는 첫째로 정부다.

정부가 1999년이라는 시련에 대해 개혁이란 구호를 달고 시시콜콜 반 (反) 시장적 능동으로 대처하고 나오면 그럴수록 역설적이게도 이 패러미터들은 점점 더 구속 (拘束) 될 것이다.

거기에 정부 자신도 구속돼 간다.

이런 정부의 능동에 대해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두번째 원인제공자가 있다.

그것은 시카고대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R 루카스 교수가 말하는 '합리적 기대' 에 따라 움직이는 외국의 헤지펀드나 일반 국민들이다.

그래서 이자율은 투자를 부추길 수 있는 수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원 - 달러 환율은 수출 드라이브가 걸릴 수준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만다.

이 합리적 기대의 존재를 권력주변의 이코노미스트들은 외국인의 음모, 시장의 실패, 재벌의 저항, 집단이기주의 등으로 부르려 한다.

1999년이라는 시련의 해역을 벗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 시련이 정부와 그 이코노미스트들로 하여금 이 두 원인을 인식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도 포함해야 한다면 그만큼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사이에 불어나는 실업인구다.

대량실업은 1999년이 줄 수 있는 위에 말한 세번째 당혹으로 가는 중간현상일 수도 있다.

강위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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