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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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7장 노래와 덫

그가 가리킨 쪽은 간판의 전등들이 휘황하게 켜져있는 역전거리가 아니었다.

행인들의 내왕이 뜸한 어두운 뒷골목 쪽이었다.

두 가지 선택 중에서 철규는 허름한 식당을 택한 것이었다.

시내 한가운데는 밤에도 해장국을 파는 집이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콧등을 스칠 듯이 마주 바라보고 있으면서 그 여자를 단념해야 한다는 명제와 마주쳐 있다는 것도 비극이란 생각만 맴돌고 있는데, 성민주가 소주를 시켰다.

결별에다 쐐기를 박는 데는 소주를 마시고 그 취기가 시키는 대로 푸념이나 넋두리를 쏟아버리는 것도,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성민주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한 술도 싸늘하게 식은 가슴을 뜨겁게 적셔주지는 못했다.

두 병을 나누어 마시는 동안 그들의 입에선 허튼소리 한 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정민이라 했습니까? 딸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요. 혈육이라곤 걔 하나뿐입니다. " 대답을 해두고 철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당혹감을 느꼈다.

몇 개월 동안 서로 연락조차 끊고 있었다.

그런데 성민주가 왜 느닷없이 정민이를 들먹이고 있는 것일까. "자주 만나보진 못하겠어요?"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죄책감만 늘어가요. 그러나 지금으로선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어요. 떠돌이로 생활하고 있는 처지에 무슨 염치로 혈육을 돌본다는 엄두를 내겠습니까.

다만 하숙비에 합당할 만한 돈을 매달 꼬박꼬박 부쳐주는 것으로 그나마 아비로서 체면유지하려고 몸부림이지만, 그 아이에겐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부질없는 짓으로 비칠 뿐이겠지요. 삐삐치고 이동전화로 안부 주고받는 건 서로 잊어버리지 않았었는데, 언제부턴가 그것도 시들한지 뜸해지고 말았어요. 혈육이라 할지라도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란 그런 수순을 밟아 멀어지는 것인지…. 뭐가 뭔지 모르겠소. "

"우리 사이도 그처럼 되겠지요. 한번 던진 돌이 파문을 일으키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나면, 씻은 듯이 잔잔해지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되겠죠?"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 성민주가 느닷없이 정민이 얘기를 꺼낸 저의를 알 만했다.

취기가 돌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철규는 그 순간, 성급하게 일어나서 음식값을 치렀다.

그의 돌출행동에 놀란 성민주가 황급히 뒤따라 나왔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식당 문 밖으로 나섰지만, 취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먼 거리도 아닌 호텔까지 그녀와 나란히 걷고 싶었는데, 무슨 심술 때문인지 그런 보잘 것 없는 배려조차 행동으로 옮기려 드니까 태산이 가로막힌 것처럼 아득한 일로만 느껴졌다.

여자들은 그런 사소한 배려나 관심에도 곧잘 감동한다는 것도 생각났다.

그러나 그가 앞에서 걷고 그녀는 두 발짝쯤 뒤에서 갯벌에 난 새의 발자국을 밟듯이 그렇게 열적은 모습으로 호텔까지 걷고 말았다.

호텔 정문에서 철규는 멈추어섰다.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뒤로 거리를 향해 돌아서 있는 성민주의 웅크린 모습이 바라보였다.

그와 헤어지기 위해서 서울에서 안동까지 먼 여정을 달려온 여자였다.

그러나 마지막 밤을 같이 지냅시다.

그런 말이 철규의 입에서 불쑥 흘러나오기를 여자는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눈가장자리를 훔치고 있는 성민주의 모습이 유리문에 어른어른

비치고 있었다.

그는 유리문을 밀치고 한 켠으로 비켜서면서 말했다.

이미 결심한 사이라면 이별의 시간을 길게 잡을 까닭이 없었다.

시간을 끌면, 남을 것은 치사하고 누추한 것밖에 없을 것 같았다.

유리문을 벗어나서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는 여자의 구두 뒷굽소리가 그때처럼 앙징스럽게 들렸던 적은 없었다.

이별할 때 단호하게 보이라고 굽 높은 구두를 여자들이 신고다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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