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무의미해진 30대 기업 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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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해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30대 기업집단을 지정해 왔다.

공정거래법에는 시장지배적 사업자를 지정하게 돼 있다.

그러나 30대 기업집단이 반드시 시장지배적 사업자는 아니다.

이 법에서 시장지배자는 한 사업자의 시장지배율이 50% 이상이거나 셋 이하 사업자의 시장지배율이 75% 이상일 때로 정해져 있다.

공정거래법은 시장지배라는 합리적 독점금지 정신과는 별도로 '경제력집중 억제' 라는 별도의 '반 (反) 재벌' 조항을 설치해 두고 있다.

'대규모기업집단' 이 지정되는 것은 이 조항에 따라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규모기업집단을 특성의 기술 (記述) 에 의해 정의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그 결과 매우 비과학적이게도 기업집단의 자산 크기 순서에 따라 주욱 세워 '5대 재벌' '10대 재벌' '30대 재벌' 식으로 지정하는 궁여지책을 택했다.

불행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대로 이 방식은 경제력집중을 경계하는 대중의 호응을 얻는 데 여태까지 별 지장이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서수 (序數)에 기준하는 이 방식을 쓰면 아무튼 그 대상 기업집단을 언제나 추려 낼 수 있다는 것도 편리한 점이었다.

이러한 편리성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올해와 내년에는 사정이 무척 변했다.

지난해까지의 30대 기업집단 가운데 반 이상에 기업집단 와해 (瓦解)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30대' 는 있으나 '경제력집중' 은 찾을 수 없게 됐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공정거래위원회가 초지일관해 경제력집중 30대 기업집단을 지정한다면 이제는 사람들이 거기에 포함된 기업의 면면을 보며 실소 (失笑) 를 금치 못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언제 워크아웃 대상 또는 퇴출 대상으로 지정될지 모르는 중심기업을 가진 기업집단을 한편에서는 경제력집중 억제 대상기업으로 지정하게 되면 공정거래법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수도 있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이 기회에 '몇 대 기업집단 지정' 을 완전히 폐지하라고 권하고 싶다.

경제력집중을 막으려면 그 크기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다.

경영투명성의 확보, 기업지배구조의 개선, 기업 인수.합병 (M&A) 의 시장화 (市場化) 를 통해 기업집단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이익과 경영권이 현재와 미래의 주주에게 공정하게 귀속하도록 자유시장주의적 장치를 마련해 도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공정거래법의 해당조항을 개정하려는 노력에는 소극적인 반면 '몇 대 기업집단' 지정에 연연하고 있어서야 구조개혁시대의 공정거래위라고 보기는 힘들다.

위원회는 전향적 개혁의 선두에 꼭 서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지다가는 구조개혁의 뒷다리를 잡고 있었다는 비난의 대상으로 언젠가 전락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공정거래위는 직시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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