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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연의 hot & pop] 오직 CD 속지 때문에 수입음반 사던 그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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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뮤지션이자 팝아티스트인 남궁연의 칼럼을 새로 시작합니다. 이 칼럼은 독자들이 팝 문화를 좀 더 쉽게 한 발짝 더 들어가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지침서가 될 것입니다. 편집자

일기장도 사진첩도 아닌 CD 케이스 안에 있는 속지(booklet)를 오랜만에 꺼내 봤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베스트앨범입니다. 언제까지 퀸시 존스가 앨범 프로듀싱을 맡았는지도 확인하고 옛 추억을 더듬어 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집사람이 정해 놓은 한 달간의 추모 기간 동안은 집에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듣는 것이 가정평화 유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캬~’ 그의 노래 ‘human nature’의 아름다운 인트로는 저를 고등학교 일학년 때로 돌려놔 주는군요.

그러고 보니 음원을 다운로드받는 시대에 살면서 CD 속지를 살펴보는 재미도 이제는 추억 속의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팝음악 애호가에게 ‘CD 속지’란 거의 바이블 같은 것이었습니다.

라디오를 통해 노래를 들으면서 대충 소리 나는 대로 노래를 읊조리다 CD를 손에 쥐면 가장 먼저 가사를 보았습니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나의 콩글리시는 자리를 바로잡게 되죠. 예를 들면 ‘삐레’에서 ‘beat it’으로 말입니다.

아카펠라 그룹 singer’s unlimited 스페셜앨범의 속지는 58페이지나 된다.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special thanks to’입니다. 이 부분을 통해 해당 아티스트가 감사를 전하는 인사들의 이름을 보면서 그가 누구와 친한지 등 사적인 면을 공식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CD 속지는 저처럼 음악으로 밥벌이를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1980년대의 젊은 악사들에겐 또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깨알같이 적힌 연주자 정보와 맨 마지막 장의 앨범 전체 정보는 본고장 동향과 팝음악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생계지침서이기도 했습니다. 이 말이 왠지 ‘오버’처럼 들리시죠?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죠.

우선 속지에는 노래마다 편곡 및 연주자 표기(session credit)가 있습니다. 작사·작곡·연주는 누구인지 명기한 거죠. 이것을 눈이 빠지도록 보면 어떤 사람이 악기 파트별로 실세인지를 알 수 있죠. 그러곤 맨 뒷면을 봅니다. ‘recorded in’에서 녹음한 스튜디오를, ‘recorded by’에서 녹음한 분을, ‘mixed by’에서 앨범의 현재 상태로 음향을 조절한 엔지니어를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produced by’에서 모든 앨범 작업을 총괄한 감독의 이름을 확인합니다.

이 정보들로 주류 팝시장의 사운드를 분석합니다. 고백하자면 이 말은, 어느 날 음악을 듣고 있는데 아버지가 불쑥 들어오셔서 ‘넌 뭘 먹고 살려느냐’고 물으시기에 이렇게 대답한 뒤, 그 말이 꽤 그럴 듯해서 그 뒤에도 주로 써먹던 말입니다.

그런데 영 틀린 말은 아닙니다. 유명한 가수의 곡에 사용된 신시사이저 음색은 어느 회사의 어떤 소리인지 추측해 보고, 드럼 스네어의 피치는 어떤지, 또 목소리에는 리버브(흔히 에코라고 하는 잔향효과의 본래 용어)와 컴프레서(소리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커지면 더 이상 커지지 않게 해주는 외부장치)를 얼마나 걸었는지 등을 마치 만화영화 속 우주과학 연구소 김 박사처럼 나름대로 비교분석해 가며 체크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내 연주 스타일을 트렌드에 맞추어 살짝 업그레이드 하기도 하고, 비록 아무도 찾지 않는 곡이지만 사운드는 팝시장의 본류에 자주 등장하는 신시사이저 음원들로 바꾸어 데모를 다시 만들어 놓곤 했답니다.

그래서 당시엔 음반이 라이선스로 출반돼도 악사들은 명동을 뒤져 오리지널 수입음반을 샀습니다. 국내 발매용에는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앨범 크레딧은 빠져 있고, 엉뚱하게 국내 평론가의 해설을 넣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외국에 다녀오며 원본 CD를 사왔다는 선배님 전화를 받고 새벽에 달려가서 속지의 내용을 연습장에 그대로 옮겨 적었던 일도 떠오르네요.

요즘엔 수많은 영화를 한꺼번에 다운받아 주말에 몰아치기로 봐서 영화내용은 알겠는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영화광들이 꽤 많습니다. 하긴 한편에선 저작권법을 강화한다 하고, 또 한편에선 영화 다운받는 데 몇 초라며 홍보하고 있으니. 디지털 기술은 우리에게 ‘편리’라는 선물과 ‘과정 생략’이라는 독을 함께 주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집에 방치된 CD가 있으면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속지를 한번 들여다 보시길 권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곡의 피아노는 누가 쳤는지, 기타는 누구인지를 말입니다. 그러면 음악을 듣는 맛은 두 배로 커질 것입니다.

‘약은 약사에게 음악은 악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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