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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兆클럽'의 침묵과 복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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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 문닫아 버린 공장 꼴을 보기 싫어 해외로 나가 버린 기업인이 있다. 이 나라 저 나라 맥없이 돌아다니다 10여년 전 자신이 견학했던 일본의 한 중소기업을 다시 찾았을 때 그는 현관에서 발을 멈추었다. 건물 기둥에 붙어 있는 표어에 시선이 박혔다. '우리는 목숨걸고 일한다'고 적혀 있었다. 아니 그때 있었던 저 표어가 지금도 뜯겨 나가지 않았단 말인가. 저런 구닥다리 노조관이 심판받지 않고 있단 말인가. 노동 착취며 인권 탄압이라는 비판도 일지 않았단 말인가….

만감이 교차된 채 그냥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동안 노사분쟁으로 시달렸던 서러운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핑 돌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면 펑펑 울고 싶었단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유달리 말없는 그룹이 기업인들이다. 무슨 세미나에서도 그렇고 친목 모임에서도 그렇다. 1년반 전 새 정부 출범 땐 몇가지 불안 속에서도 상당한 기대를 걸며 건의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이 입을 닫기 시작한 것은 결코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다. 정부와 국회에 대해 아~하고 소리지르면 어~하고 돌아오는 메아리가 있어야 하는 데 그게 없다며 기업인들은 답답해 한다. 들리는 건 시장경제 시스템을 흔들거나 사회주의적 편향성을 드러내는 소리다.

설령 세금을 깎아준들 기업들이 투자할 전망이 없어 보인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정보는 현금을 어떤 형태로 보관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사상 유례없는 재무 안정성을 확보한 대기업들의 움직임을 눈여겨 보라. 1조원 이상 영업이익을 낸 몇몇 기업들이 이른바 '조클럽'으로 탄생했지만 날개를 펴지 않고 있다. 설비투자 대신 현금 확보를 경영의 최우선 방침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침묵을 지킨다.

그들은 가진 자에 대해 증오를 부추기고 있는 386 '애국 세대'의 경제관에 너무 큰 상처를 입었다. 성실 기업과 불성실 기업이 구별되지 못한 채 도매금으로 비판대에 올라가는 것을 가슴아파 한다.

'조클럽'에 이어 일부 중소기업도 현금 확보에 관심을 기울인다. 재무구조가 개선됐는데도 투자를 외면한다. 그들은 갈수록 골프에 더 열심이다. 주중이건 주말이건 골프장에서 다른 기업인들을 만나 푸념하고 비관하고 그리고 낙담한다. 국내에서 방황하거나 해외로 떠도는 성실 기업인들조차 아주 중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 자신이 오랫동안 투자하지 않고 얼마나 견딜 수 있을 것인가를….

실험기간이 길어질수록 동참자가 더욱 늘어날지 모른다. 청산 대상으로 몰린 부자들이 소비를 중단하고, 파업으로 인한 기업의 노동손실 일수가 세계 주요 국가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그들을 더욱 침묵으로 내몰고 있다. 각종 규제의 벽을 넘고 노조와의 힘든 교섭을 이겨내고서도 공장을 해외로 옮기거나 아예 기업을 떠나는 경제인들의 감정은 "이제 그냥 쉽게 살겠습니다"는 한마디에 응축돼 있다.

일본에서 '우리는 목숨걸고 일한다'는 구호를 보고 눈물 흘린 중소기업인이 며칠 전 다시 해외로 떠났다. 노조가 목숨걸고 투쟁하는 공장에 들어서기가 무섭다고 한다. '목숨건다'는 의미가 한쪽은 상생을 의미하고 다른 한쪽은 죽기 아니면 살기를 의미할 정도로 기업관.노동관이 거칠게 변질했다. 기업인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그는 다시 묻는다. 성실한 기업인이 시장을 떠난다면, 그리고 시장이 침묵을 지킨다면 이건 분명 시장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고용과 성장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더욱 짙어진다.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