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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대학살의 빚잔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스위스의 은행은 장사하기가 참 편하다.

금리가 낮은데도 전세계에서 예금이 몰려든다.

예금주 신분의 비밀을 철저하게 지켜주기 때문이다.

특히 독재자나 범죄자 등 검은 돈을 가진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50여년 전에도 그랬다.

나치독일은 점령국 중앙은행에서 강탈한 금괴를 스위스 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전쟁비용을 빌려갔다.

금괴들 중에는 학살한 유대인들의 반지와 금이빨까지 함께 넣어 녹인 것도 있었다.

나치에 위협받는 지역의 많은 유대인도 재산을 같은 곳에 맡겼다.

전쟁이 끝난 뒤 담보와 예금 중에는 찾아가는 사람이 없는 것이 많았다.

2차대전을통한 스위스 은행의 부당이득 액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종전후 연합국측이 이 돈의 환수를 요구했을 때 한 은행의 부총재가 논쟁중 흥분해 "5억프랑을 내놓으면 우리 은행은 문닫으란 말이오?" 라고 소리친 일이 있다.

당시 5억스위스프랑이면 지금 12억5천만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스위스는 이때 5천8백만달러를 내고 연합국측 요구를 무마시켰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재작년 결국 12억5천만달러를 지불하기로 동의했다.

유대인단체들이 집단소송을 제기하고 소송의 규모가 날로 커지자 결국 손을 든 것이다.

완강하기로 이름난 스위스 은행이 굴복하자 유대인 피해보상소송의 불길이 정신없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의 은행들은 스위스 은행과 같은 책임을 추궁당하고 있다.

보험회사도 생명보험 지급금 청구의 홍수를 기다리고 있다.그뿐 아니라 유대인의 무임금 강제노동을 이용한 회사들까지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지금 추세를 보면 보상총액이 수백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재미있는것은 이 '소송전쟁' 의 주역이 미국 변호사들이라는 사실이다.

수십억달러에 이를 수임료를 바라보고 수많은 미국 변호사들이 떼지어 유럽을 휩쓸고 다니며 피해자를 모으랴, 대상 은행 - 회사들과 흥정하랴, '변호사의 왕국' 을 뽐내고 있다.

전쟁 중의 강제노동을 연구한 유럽학자들은 이들에게서 고액의 자문료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유대인세계의 반응도 어지럽다.

여러 단체들이 변호사집단과 결탁해 헤게모니 경쟁을 벌이고 있고, 스위스에서 따낸 배상금의 지급방법에도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수용소의 생존자 35만명은 대부분 70대 이상의 고령자들인데 언제 돈을 받게 될지 기약이 없다.

때늦은 '빚잔치' 가 대학살의 역사적 의미를 더럽히고 있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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