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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는 어디로 가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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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산MBC는 곧 경영난을 겪었다. 끊임없이 시설투자를 해야 하는데 주식대금의 불입조차 순조롭지 않았다. 제작비는 상상을 웃돌았지만 광고 수입은 미미했다. 설상가상으로 사라호 태풍이 불어 경기가 급랭하자 경영압박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했다. 경영진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해 9월에 부산MBC의 경영권을 부산의 자산가이자 부산일보 경영주이던 김지태(金智泰)에게 넘겼다.

김지태가 부산MBC를 인수한 뒤 이 방송사는 단연 활기를 찾았다. 다음 해 마산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일어나자 부산MBC는 당국의 탄압을 무릅쓰고 시위상황을 신속히 보도했다. 부산MBC는 결과적으로 마산의거가 부산으로, 대구로 북상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4월혁명이 성공하자 장면(張勉) 민주당 정부는 민주운동에 기여한 공을 높이 평가해 부산MBC에 표창장을 수여했다.

김지태는 부산이라는 지방도시에서 방송을 경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서울에 민방을 설립하기로 작정했다. 1959년 이미 체신부가 서울에 네 개의 방송사 설립을 허가한 상태여서 추가로 허가를 얻는 것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김지태는 화가 고희동(高羲東)이 가지고 있던 허가장을 사들여 61년 법인을 설립하고 그해 12월 2일 서울에서 최초의 민영 상업방송인 한국문화방송(MBC)을 개국했다.

이날 아침 6시에 MBC는 애국가와 사가를 잇따라 내보낸 뒤 베르디의 가곡 ‘아이다’ 가운데 개선행진곡을 깔고 최계환 아나운서실장이 격앙된 목소리로 개국 선언을 했다. 자리를 같이한 임직원들은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초기에 MBC는 경영난을 겪었지만 곧 광고가 쏟아져 들어와 순식간에 안정 기반을 구축했다.

‘아이다’의 개선행진곡을 더 크게 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MBC는 뜻하지 않은 시련에 부딪혔다. 경영주인 김지태를 박정희 군사정부에서 잡아가 부정축재자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결국 김지태는 62년 5월에 MBC의 경영권은 물론 부산MBC와 부산일보의 소유권을 모두 5·16장학재단에 넘겨주고 풀려났다. 정변으로 권력을 찬탈한 군부는 MBC그룹의 경영권마저 같은 수법으로 빼앗은 것이다.

5·16장학재단이 경영주가 된 뒤에도 MBC는 민영방송의 성격만은 유지했다. 그러나 이른바 신군부가 80년 11월 14일 언론통폐합을 단행하자 MBC는 치욕적인 성격 변화를 감수해야 했다. MBC는 이듬해인 81년에 주식의 70%를 국가에 넘겨 민영방송의 틀을 상실했다. 더구나 국가는 MBC 주식을 한국방송공사(KBS)에 현물 출자함으로써 KBS가 졸지에 MBC의 대주주가 되었다. 이런 참으로 희한한 조치를 통해 MBC는 공영방송으로 탈바꿈했다.

MBC는 88년 방송문화진흥법이 제정돼 공익법인으로 새로 자리매김했다. 이 법을 근거로 방송문화진흥회가 설립되었다. 방송문화진흥회는 문화방송의 주식 70%를 출연받아 문화방송의 대주주가 되었다. 정부는 방문진의 이사 선임권을 쥐고 있어 방송의 자율성이나 독립성은 하나의 구두선(口頭禪)일 따름이다.

또다시 MBC의 위상이 일대 변화를 맞이할 것 같다. 새로 뽑힌 방문진 이사장은 비록 사견임을 전제했지만 다양한 민영화 방안을 검토할 것임을 천명했다. 예상한 바다. 그러나 MBC 문제는 정파적 이해의 대변자로 구성된 방문진이 전단할 문제가 아니다. 물론 정부가 자의적으로 좌지우지해서도 안 된다.

국민의 의사를 폭넓게 들어야 하고, MBC를 일군 종사자들의 의사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MBC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답은 간명하다.

정치권력이 아니라 MBC 종사자와 국민이 함께 주체가 되는 방향이라야 한다. 정도를 찾으면 길이 보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김민환 고려대 교수·언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