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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혁 칼럼]특보를 두는 이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중국 명 (明) 나라 관리였던 여곤 (呂坤) 은 후에 중국관리의 지침서가 됐다는 명저 (名著) '신음어 (呻吟語)' 에서 "관직이 높을수록 견문이 좁아진다" 고 썼다.

군주는 재상보다, 재상은 감사 (도지사) 보다, 감사는 수령 (군수) 보다 견문이 못하다는 것이다.

지위가 높을수록 현실과 세상사에서 멀어지고 고립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옛날 군주와 달리 대통령은 신문.방송이나 여론조사 등을 통해 민심을 파악한다고 할지 모르나 기본적으로는 수많은 단계를 거쳐 올라오는 보고를 받고 국정을 처리한다는 점에서는 옛날 군주와 큰 차이가 없다.

또 대통령 주변에 기라성 같은 참모와 비서진이 있다고 하지만 이들은 모두 상명하복 (上命下服) 관계에 있는 대통령의 부하다.

여간 특출한 인물이 아니고는 대통령의 비위를 거슬러 가며 반대의견을 제시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부하들은 제각기 일정한 소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맡은 분야에서 지시받고 보고하는 것이 주임무가 된다.

국정전반을 종합적으로, 큰 차원에서 파악하고 보고하는 기능이 그들에게 있기 어렵다.

가령 민심동향이나 서민의 원망, 정책과 현실의 괴리 등은 대통령이 꼭 알아야 할 일이지만 여러 소관에 걸치는 이런 일들이 제때에 보고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의 대통령 역시 자칫 세상사와 멀어지고 고립될 위험성은 옛날 군주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이 그런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지시받고 보고하는 충성스런 부하들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한 것이다.

대통령으로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사람, 버거운 사람, 그의 말이라면 대통령도 경청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 주변에 있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대통령이 수시로 그런 인물들을 만나 격의없이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듣는다면 내각이나 비서실의 규격화된 보고나 건의와는 다른 아이디어와 충고, 생생한 현실담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식으로 말한다면 막빈 (幕賓) , 요즘 말로 한다면 특보 (特補)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부하로되 손님처럼 대접하고, 지시 - 보고 차원이 아닌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런 인물들을 주변에 둔다면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한고조 (漢高祖) 를 도운 장량 (張良) 이나 유비 (劉備) 의 제갈량 (諸葛亮) 같은 인물은 역사에 남는 명 (名) 특보였다고 할 것이다.

이들은 주군의 녹 (祿) 을 받는 처지이면서도 '선생' 호칭을 들었고 국가경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특보를 두었다.

당시 석학으로 꼽힌 박종홍 (朴鍾鴻).이용희 (李用熙) 씨 같은 분, 엘리트 학자였던 김경원 (金瓊元).함병춘 (咸秉春) 씨 같은 분들이 특보였다.

朴대통령은 한달에 한번 정도 특보들과 막걸리를 함께 하며 의견을 들었고 이들에겐 반드시 깍듯하게 경어 (敬語) 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회의와 달리 이 자리에서는 '언론자유' 가 보장됐다고 한다.

朴대통령이 이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YS는 임기말에 고독감에 빠져 혼자 통음 (痛飮) 하기도 했다는데 만일 그 주변에 국민의 존경을 받는 특보들이 있었던들 그 자신이나 나라모양이 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판에 한가하게 그런 특보를 둘 필요가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나 특보란 국정에 반영되는 좋은 의견 하나로 몇년간의 월급값을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비용은 그리 문제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대통령에겐 말 잘듣는 부하 외에도 '천하대사' 를 함께 논할 스승이나 친구나 동료가 있어야 하고 그들의 충고와 비판.의견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고립되거나 세상사와 멀어지는 것도 방지할 수 있고, 스트레스를 분산시킬 수도 있다.

구중궁궐 같은 우리 청와대문화를 생각하면 더 절실한 문제다.

결국 일이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정부에 좋은 인물이 충분히 있어야 좋은 국정추진도 가능해진다.

국가경영은 우수한 지도자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다.

경륜과 학식이 있고 사회적 평가를 받는 각계 인물이 모여 좋은 팀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만일 군을 잘 아는 안보특보가 있어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오늘의 심각한 군기강문제 같은 것은 오래전에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경륜있는 정치특보가 있었던들 오늘의 정치가 총풍.제2건국 파문 따위로 바닥수준을 헤매고 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인물이 대통령 곁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연말은 그런 문제를 생각해볼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송진혁(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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