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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우리 해외 입양인은 강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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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내 인생은 1971년 2월 11일 시작됐다. 미국인 아버지 데이비드 팔머와 어머니 패트리샤 팔머가 나를 입양한 날이다. 내가 두 살도 안 됐을 때였다고 한다. 나에겐 남들처럼 병원에서 부모님 품에 안겨 있는 신생아 사진이 없다. 입양 직전에 '박석철'이라는 이름과 식별번호가 적힌 팻말을 가슴에 안고 혼자 찍은 것이 첫 사진이다.

현재 입양인이라는 사실이 원망스럽지는 않다. 결국 내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상실감을 느끼고 '나는 누구인가' 혼란스럽지만 이제 어느 정도 한국 출신 미국인으로서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입양 후 미국 중부지역 교외의 백인 밀집지역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친자식 두명과 나를 포함해 입양한 자식 일곱명을 키웠다. 두명은 베트남에서, 다섯명은 한국에서 입양했다. 부모님은 나에게 한국 문화와 한국인들을 접촉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인종적 배경을 최대한 인정해 주려고 노력했다. 한인교회와 한글학교에도 다녔다. 하지만 가끔씩 한국적 뿌리를 거부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아마도 동양인으로 받는 차별을 피하려 했기 때문인 듯하다. 초등학교 때 백인 아이들은 동양인을 놀리는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 창피함을 모면하기 위해 그들에게 동조했다. '중국인' 하면서 눈초리를 위로 올리고, '일본인' 하면서 눈초리를 내리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낯선 사람들도 종종 나에게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중국어를 하느냐"고 물어왔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백인"이라고 둘러댔다. 자연스레 스스로를 백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백인 양아버지가 기차를 타고 떠나고, 한국인 어머니가 플랫폼에서 손을 흔드는 장면'을 마치 옛 기억처럼 가지게 됐다. 물론 완전한 환상이었다. 이별은 참으로 슬픈 일인데도 이런 환상은 오히려 편안함을 주었다. 빠른 속도로 미국 주류사회에 동화됐다. 여느 미국인처럼 운동에 열중했고 커서는 프로야구 선수, 심지어 미국 대통령이 되고 싶어 했다. 백인 친구들이 동양인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뒤 "너는 그들과 달라"라고 말해줄 때는 참으로 슬프게도, 그들이 나를 동양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너무 다행스러웠다.

22세가 되던 1992년 한국을 처음 찾았다. 마음은 미국인 관광객인데 외모는 거리의 모든 사람들과 비슷한 나를 새삼 발견했다.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내게 사람들은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라고 물어왔다. 미국에서 자라면서 들은 질문과 같은 것이었다. 이곳(한국)에도 저곳(미국)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 혼란스러웠다. 백인 사회에서는 인종차별을, 한인 사회에선 '입양아'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닌데"라는 강한 반발이 생겼다.

인종이라는 한계 때문에 결코 '진정한 미국인'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어와 문화를 익히면 한국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95년 한국의 한 대학에 유학을 왔다.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한 어머니를 찾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경남 마산 출신이라는 것과 69년생으로 추정된다는 것 외에는 내 신상에 관한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친부모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다. 만약 상봉한다면 "양부모 밑에서 훌륭하게 성장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전해드릴 작정이다. 어느 정도 한국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미국과 한국을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갖게 됐다.

한국인들이 해외 입양인들을 동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우리를 해외에 형성된 한민족 커뮤니티라는 점을 인식했으면 한다. 입양인의 대다수는 상실감에 빠져 있지 않다. 우리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살아남았으며 그래서 강하다.

바라건대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20만명 가까운 입양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우리를 어떻게 대하고 활용할지 토론해주기를 바란다. 한국은 이를 더 이상 비밀로 하거나, 우리를 창피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한국 정부와 한국인.입양인 모두 서로의 상처를 치유할 때다.

존 팔머 (한국명:박석철) 뉴욕 콜게이트대 교수.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