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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태 대표의 출마 선언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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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그는 내키지 않았다. 13년간 정든 지역구를 떠나야 한다니…. 아무리 원외라지만 여당의 대표가 아닌가. 다가올 총선에서 얼마든 생환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옮겨가야 할 곳이 승부를 점치기 어려운, 말 그대로 척박한 곳이었다. 그로선 피하고 싶은 희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심했다. 대통령을 포함, 여권 전체가 간곡히 원했다. 그는 “당의 대표로서 정국 안정에 기여해야 할 책임을 다하기 위해, 출마해 달라는 당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1998년 7월 재·보선에 나선 국민회의 조세형 총재 권한대행의 얘기다. 당시 그는 간신히 이겼다. 공동여당의 총역량을 투입했는데도 그랬다. 비록 승리한 선거였지만 여당 대표의 재·보선 출마가 국정에 부담이 된다는 논거가 만들어진 계기였다. 여권의 어느 누구도 그러나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당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11년 만에 여당 대표가 재·보선에 출마한다고 한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다.

기묘한 건 박 대표는 출마하겠다는데 여권에선 “나가려면 대표직을 떼고 가라”고 성화다. 그가 임명장을 준 사람도 공개적으로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묘한 게 또 있다. 올 초 그는 경북의 한 주막에서 결심했더랬다. “유유히 흐르는 장강(長江)처럼 인생을 살기로 했다. 재·보선이 정쟁화하는 걸 막아야 한다”고 말이다. 4월 재·보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의사였다.

하지만 요즘엔 이렇게 말한다. “정권심판론이 불거진다면 떳떳하게 막아내겠다. 그간 정치 행보를 심판받고 싶다.” 당시와 지금 상황 중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건 출마 지역 정도다. 그때는 수도권이었고 지금은 ‘한나라당 후보’란 꼬리표만 달면 웬만큼 당선이 보장된다는 영남이다. 그는 왜 여당의 손을 들어주면 줬지 여당을 심판한 적이 없는 곳에서 굳이 심판을 받겠다고 자처하는가.

이뿐이 아니다. 여당이 4월 선거에서 참패한 이후 쇄신 요구가 분출했고, 박 대표 역시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는 “대화합에 직을 걸겠다”며 “모든 걸 짊어지고 험난한 길을 나서고자 한다”고 호언했다. 그로부터 석 달여가 지났건만 대화합 또는 쇄신 얘기는 거의 없고 그의 영남 출마 소식만 들려온다. 이른바 ‘텃밭’ 출마가 험난한 길인가.

그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국회의장으로서 정치인생을 잘 마무리하고 싶어 하더라”거나 “그간 여당 대표로 고생했다”고 설명한다. “본인의 의지가 워낙 강하다”고 전하는 이도 있다. 인지상정 차원이란 거다. 아무도 국가를 위해서, 혹은 당을 위해서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국회의장이 개인의 해원(解寃)을 위한 자리인가.

한나라당을 두고 ‘웰빙당’이라고 한다. 대의명분보다 개인의 이익을 앞세운다는 말일 게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어야 하는데, 현실에 안주하여 기득권만 지키려 하고 그 결과 부패하는 보수주의자가 많다”(서울대 박세일 교수)는 건 이미 상식이다.

박 대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출마 선언문이 궁금해졌다.

고정애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