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되찾은 이웃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중국은 2천년간 우리 민족에게 큰 영향을 끼쳐 왔다.

정치적으로 종주국 노릇을 한 기간도 적지 않지만 쉴새없이 쏟아져 들어온 문화적 영향이 더 크다.

경제면에서도 산업기술의 모델로서, 그리고 거의 유일한 대외무역 상대자로서 중국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막중한 역할을 맡았다.

우리민족이 중국에 끼친 영향보다 중국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이 압도적으로 크다.

이것을 '예속의 역사' 로서 타기해야 할 것인가.

그런 관점은 구한말에 크게 유행했다.

'독립문' 을 세운 뜻도 중국과의 관계청산에 있었고 독립협회의 구성에도 반청파 (反淸派) 의 비중이 적지 않았다.

이완용 (李完用) 같은 매국노들이 독립협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아이러니도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일본의 뜻에 맞춰 이해할 일이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경쟁자인 청나라의 기득권을 소멸시키는 방법으로 '민족독립' 사상을 선전했다.

근대적 민족주의는 여러 민족의 병립 (竝立).경쟁을 전제로 한다.

문명권의 거대한 중심국가와 일대일로 상대하던 근대 이전의 상황을 민족주의로 재단한다는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라 할 것이다.

임오군란 (1882) 때 청군 (淸軍) 이 대원군을 납치한 후 갑오경장 (1894) 때까지 서울에 주둔하며 정치에 간섭한 경험이 당시 일본측의 독립사상 선전에 설득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적 정치간섭은 조선개국 이래 이례적인 일이었다.

병자호란 (1836) 때도 청나라는 조선과 명 (明) 나라 사이의 군사적 동맹을 해제시키는 데 만족했다.

일본의 '탈아입구 (脫亞入歐)' 에 공명한 개화파의 주도 아래 2천년 한.중관계는 '독립' 의 이름으로 부정됐다.

막상 독립을 완전히 잃은 일제시대엔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세력만이 중국과의 연대를 꾀할 뿐이었다.

해방후에도 남한인들에게 '중공 오랑캐' 가 최악의 적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2천년 관계사의 뜻을 되밝힐 계기는 나타날 수 없었다.

탈냉전시대의 도래 후에도 냉전시대를 아직도 청산못한 우리는 중국과의 관계에 누구보다 조심스런 자세를 지켜 왔다.

이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방문으로 한.중관계는 새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엄청나게 덩치큰, 그리고 오랜 역사를 함께 나눈 나라가 이웃으로 모습을 다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개항기 이전처럼 압도적인 존재로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잘 알고 대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