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시평]외부 찬사에 현혹되지 말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최근 들어 우리 경제 상황이 다소 호전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9월중 제조업 생산지수가 약간 상승하고 있고 실업률도 약간의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상품수지도 수입급감 때문이긴 하지만 38억달러라는 높은 흑자 수준을 나타냈다.

거시지표들도 괜찮은 것이 꽤 있다.

금리가 계속 하향 추세이고 환율도 1천3백50원대에서 안정돼 있으며 외환보유고도 4백50억달러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러한 국내경제지표의 호전과 같이 해 외국에서는 한국 경제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연일 발표되고 있다.

미국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최근 예일 법과대학원의 특강에서 금융시장 붕괴에서 촉발된 전반적 경제위기를 아주 지혜롭게 극복하고 있는 나라의 사례로 한국을 들고 있다.

특히 한국의 리더십에 대해 논평하면서 국민의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개혁적 경제정책을 각계의 불평.불만을 달래가면서 꾸준히 추진해 가는 현정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의 미셸 캉드쉬총재도 지난달 워싱턴에서 있었던 세계은행과의 합동 연차총회에서 한국 경제의 정상화상황을 설명하면서 한국이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모든 국가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극찬한 바 있다.

이 모든 논평이 우리에게 듣기 좋은 찬사인 것은 틀림없다.

땅이 꺼지게 걱정하던 우리들에게 일말의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아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이른바 신3저 현상이 당분간은 지속될 것이라는 국제기관들의 전망도 나와 있다.

저금리.저유가.저달러화 현상이 지속되면 우리의 수출이 늘고 또 대외금융부담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나라안에서의 노력과 나라밖의 여건이 잘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래서 그런지 외국인의 대한 (對韓) 투자액도 증가 추세에 있다.

올해 5월까지만 해도 미미한 수준에 머무르던 외국인의 직접투자가 3분기에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다.

10월 한달만 보더라도 외국인 직접투자가 9억달러의 순증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건호전과 외국인의 찬사가 문제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지난 96년도와 97년초까지의 경제여건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미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끄덕없다는 자신감에 차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률이 7%를 상회하고 있었고 환율도 수치상으로는 안정적이었으며 외환보유고도 3백50억달러나 돼 국제기관들이 권하는 적정보유고 (연간 수입액의 30% 정도) 를 훨씬 넘고 있었다.

이른바 거시경제의 '펀더멘털' 이 건실하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자신감 뿐만 아니고 당시 외국인들의 찬사도 대단했다.

한국 경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미국의 학자들은 한국을 일본에 이은 제2의 거인이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IMF.세계은행.아시아개발은행 (ADB) 등 국제금융기관들도 '아시아의 기적' '떠오르는 아시아' 등의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그 중에 한국 경제를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격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우리 실상은 무엇이었는가.

재벌들은 부채비율 5백%를 넘는 재무구조를 가지고 무슨 배짱인지 대규모 자동차공장.철강공장.조선공장을 짓겠다고 정부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금융기관을 윽박지르기도 했다.

국민 일반도 드디어 선진국 시민이나 된 듯 세계를 누비며 돈을 물쓰듯 했고 젊은이들은 어학연수다 하여 방학중 영어권 국가들의 하계 학교를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다.

외부의 찬사에 현혹돼 번지수 파악을 제대로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IMF 위기를 된통 맞은 것이다.

우리는 2천억달러에 육박하는 외채를 짊어지고 있고 1백50만명을 넘는 실업자가 있으며 매일 문을 닫고 있는 수많은 중소기업들의 고통을 안고 있다.

경제지표가 호전되고 외국의 칭찬이 잇따르고 있다고 해서 개혁.구조조정.감량경영.환란 (換亂) 책임 규명 등을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겠느냐 하는 안이한 논리가 또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외국인들이 우리를 모범생이라고 칭찬할 때 우리는 이를 액면 그대로 믿지 말고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를 충실히 완수할 때만 경제회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유장희(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