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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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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다, 복수의 하드보일드
소설 - 김경욱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작가 김경욱은 “오랜만에 하드보일드 분위기를 내 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올 봄에 발표한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베트남 참전 용사가 아파트 단지를 무대로 손녀를 위한 복수극에 나서는 이야기다. [김도훈 인턴기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미군 신분으로 전쟁을 경험한 갱스터들이 고국에 돌아와 심각한 치안 위협이 된다고 외신이 보도한 적이 있다. 시가전에 관한 한 갱스터들의 전투력이 어떤 경찰 병력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동기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김경욱씨의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창비 2009년 봄호)는 아파트 단지에서 ‘작전’을 벌이는 베트남 참전 용사의 얘기다. 늙고 가난한 ‘사내’의 열 살 난 손녀가 초등학교 같은 반 남자아이들로부터 집단 성추행을 당한다. 가해자인 남학생들은 부유층 자제들이다. 사법적 처벌도, 가해자들의 변변한 사과도 뒤따르지 않는다. 사내는 분노한다. 더구나 그는 타인의 생사를 심판하는 게 임무로 규정된 병정노릇을 실전의 전장에서 치뤘다. 사내는 “벌 없는 곳에 죄 없다”며 스스로 단죄에 나선다. 초법적으로 범죄자를 응징하는 경찰을 다룬 영화 ‘더티 해리’ 같다. 하지만 사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다. 때문에 사내의 단죄는 심연에 빠진다. 용서를 강조하는 신의 교리와 인간적 복수욕이 갈등을 일으킨다. 인간의 의지와 신의 섭리 사이의 관계를 묻지만, 그러나 더 허망하게 이치의 부재가 세상의 이치일지도 모른다. 범죄에 무관심한 세상은 불타오르는 사내의 복수심에도 관심이 없다.

작가는 “오랜만에 좋아하는 하드보일드 분위기를 내 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하드보일드 분위기’는 헤밍웨이식의 짧고 건조한 문체는 물론 장르로서의 하드보일드를 포함하는 것이다. 즉 대도시를 배경으로 한 탐정소설적 특성이 작품 속에 강렬하다. 자연히 작품은 탐정소설 특유의 ‘발견의 구조’를 하고 있다. 서로 연관이 없는 듯하던 사건들이 짜맞춰지며 사내가 단죄에 나서게 된 이유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김씨는 “소설의 주인공인 탐정 자신이 선·악의 경계에 선 인물이거나 파면 팔수록 악의 심연이 깊어진다는 점에서 하드보일드는 환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인간 본성의 문제, 사회의 치부를 건드리기 때문에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씨의 작업이 영화·팝송 등 대중문화 산물을 활용하면서도 진정성과 문제의식에 끈닿아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플롯이 탄탄하고 곁가지가 없어 작품의 완성도가 높다”는 예심위원단의 평가를 받았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김경욱=1971년 광주 출생. 93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위험한 독서』(2008), 장편소설 『천년의 왕국』(2007).



섬뜩하다, 시 쓰기의 괴로움
시 - 김근 ‘거대하고 시뻘건 노래가’ 외 17편

시인 김근은 “시의 주제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데 거부감이 있다”고 하지만 “내 시를 읽는 정답은 없다”고도 한다. 그가 시를 쓰는게 직관이듯, 그의 독해도 직관이다. 시의 주제는 어렵지만 이미지는 명징하다. [최승식 기자]


거대하고 시뻘건 노래가

노래를 빠져나오자 다시 노래였다

어디서 가수도 없이 노래 흘러나오고

나는 노래의 감옥에 갇혔다

가늘고 긴 가사들이 몸을 향해 뻗어오고

시뻘건 노래가 몸을 덮는다 숨 막힌다

서서히 목구멍을 점령하는 노래의 실핏줄

눈알 뒤집히고 소리도 없이

혓바닥 한 자나 뽑아져 나오고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으로 무섭게

뻗어 나오는 노래의 신경다발들

노래에게 나는 양분을 빼앗기고

나는 내가 아니고 그만 노래이고

나를 온전히 먹어치우고

거대하고 시뻘건 노래의 덩어리가

사람의 마을로 기어가고 있다

위험하다

-‘문학과사회’ 2009년 여름호

김근 시인은 “이미지나 말들이 먼저 떠오른 후 시의 언어가 그것들 쪽으로 움직여 가는 과정에서 내 시는 태어난다”고 했다. 자신의 시는 의도대로 씌여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시의 주제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데 대해 거부감이 있다”고 했다.

시의 언어가 원래 뜻이 모호한데 시인이 이런 생각까지 품고 있으면 시가 쉬울 리 없다. 그의 시는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인은 “내 시를 읽는 정답은 없다”고 했다. “그러니 분석하겠다고 꼼꼼히 보려하지 말고 속도를 내 읽어가다가 눈길을 붙잡는 강렬한 대목을 만나면 그곳에서부터 직관적으로 파악해 보시라”고 권한다.

김씨는 ‘거대하고…’가 일종의 시론(詩論)을 드러낸 시라고 밝혔다. ‘노래’는 시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모습이다. 시의 화자 ‘나’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워 보인다. 이쯤 되면 메시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시쓰기의 괴로움에 관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런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김씨가 선택한 섬뜩한 시어와 상상력을 눈여겨 봐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김근=1973년 전북 고창 출생. 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뱀소년의 외출』(2005), 『구름극장에서 만나요』(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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