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예송논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1674년 2월, 현종의 어머니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정국이 흐려졌다. 왕후의 시어머니인 자의대비(인조의 두번째 부인)가 며느리 상(喪)을 당해 상복을 몇 개월 입어야 하느냐는 문제 때문이었다. 오늘날 상복이 정치 현안으로 된다면 웃을 일이지만 당시 예(禮)는 헌법과 같은 것이었다.

예조는 1년으로 정했지만 정승들의 반대로 9개월로 줄었다. 현종은 의아해 했다. "왜 이리 금방 바뀌는가." 임금의 관심은 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역사는 이를 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라 부른다. 현종은 1년으로 정리했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논쟁은 15년 전 1차 예송 논쟁이 벌어진 효종 사망 때로 달려갔다.

당시에도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이 문제가 됐다. 효종이 왕이지만 소현세자의 동생이라는 게 문제였다. '왕'을 강조하면 3년, '동생'을 강조하면 1년 상복을 입어야 했다. 당대 최고 성리학자였던 서인(西人) 이조판서 송시열은 1년을 건의했다. 그러나 남인(南人)은 3년을 요구했다.

이때 막 즉위한 현종은 1년을 따랐지만 그 과정에서 송시열이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 한 말이 불씨로 남았다. '효종이 몸(體)은 아버지를 이었으나 적장자(正)는 아니다'라고 한 것을 남인들은 '효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역적의 발언'으로 몰았다. 윤선도는 상소까지 올렸다. 이를 '서인 타도' 음모로 본 서인은 윤선도를 죽이려 들었다. 현종이 집권 서인의 편을 들어 남인은 패했고 윤선도는 귀양갔다.

2차 예송논쟁에는 남인의 이런 시퍼런 원한이 깔려 있었다. 남인은 죽을 힘을 다해 과거를 파냈다. 현종도 "당시 결정은 잘못됐다"고 손을 들어줬다. 서인들은 줄줄이 귀양갔고 남인 정권이 들어섰다. 파장은 계속돼 정쟁은 꼬리를 물었고 뒤를 이은 숙종 시대의 정치권은 보복의 피로 점철됐다.

소장파 역사학자 이덕일은 "조선 정치가 공생에서 살육으로 치닫게 된 계기가 예송논쟁"이라면서 "수십년 전 일을 파내 사상 논쟁으로 몰고 가는 파행적 정치 행태"라고 개탄한다. 이 사상 논쟁을 요즘 정치 용어로 치면 과거사 논쟁쯤 될 것이다.

오늘날 정치권 과거사 논쟁의 취지와 양상은 조선 때와는 물론 다르다. 그러나 과거사를 둘러싸고 정당들이 벌이는 예각의 대립엔 예송논쟁 때의 살벌함이 어른거린다. 더구나 그런 논쟁이 경제난에 허리 휘는 민초들과 상관없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안성규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