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경제개혁은 불황때 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불황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개혁이 가능하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많다.

일단 경제를 살려 놓은 다음 개혁이라는 이름의 수술을 단행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발등의 불은 환란 (換亂) 으로 비롯된 경제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내느냐 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불황이 심화된 시점이 아니고서는 그동안 누적된 구조적 모순을 혁신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역사적 교훈을 우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엎어진 김에 김을 맨다' 는 말이 있듯이 이번 위기에서 드러난 각종 모순과 적폐를 빠른 시일안에 고쳐냄으로써 경제가 활황일 때 부담으로 나타나는 기회비용을 최소로 줄일 수 있다는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원래 수영장 수리는 가을에 하게 돼 있고 구들장 개비는 한여름에 하는 법이니 말이다.

불황 중에 새틀짜기 작업은 대개 정부가 솔선수범하게 돼 있다.

정부내 각종 부서와 산하기관의 경영진단을 철저히 해 단위조직별 성적을 매기고 그 결과를 국민에게 공표한다.

이에 대한 국민의 반응을 점검하고 필요시 그 성적표에 조정을 가한 뒤 폐쇄할 대상을 결정한다.

나라 살림이 어려우니 정부 스스로 감량경영하겠다는데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부는 또한 불황시에 사회간접자본 (교통.통신.전기.상하수도.교량.환경.보건 등) 확충사업을 과감하게 벌인다.

불황 중에는 대개 인플레 위험이 없기 때문에 재정적자를 내면서라도 결행하는 것이다.

재정지출 확대로 창출된 고용으로부터 소득세가 걷힐 수 있고 또한 향후 개선된 사회간접자본이 가져올 생산성 제고가 이를 보전하고도 남을 수 있다는 검산이 나올 때 적자 재정을 벌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승수효과의 크기는 국가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엄밀한 계산은 사전에 해 두어야 한다.

불황때 정부는 실업관리와 관련된 새로운 체계를 개발.실시할 수 있다.

호황때는 이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시행이 어렵지만 불황이 닥쳤을 때는 이의 당위성에 대한 공감대가 쉽게 형성될 수 있다.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나 실업보험제도는 모두 대공황기간 중에 신설됐다.

정부뿐만이 아니고 기업도 불황때 새 틀을 짤 수 있다.

일이 덜 바쁠 때 기존 인력의 재교육에 역점을 둘 수 있고, 경쟁력 없는 비효율적 사업이나 부서를 비교적 과단성있게 처분할 수 있다.

경영진의 상층부를 축소 혹은 교체하는 것도 이때가 훨씬 쉬우며 겸해 경영진의 세대교체도 단시간 안에 이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얻어진 여유 자금을 희귀생산요소 (고급인력.첨단기술.신소재 등) 의 확보에 투입할 수 있고, 또 불황시에 그동안 착수하지 못했던 핵심기술에 관한 연구.개발을 해 낼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기업의 새틀짜기 과업이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데에 문제가 있다.

이를 실천에 옮긴 국가나 기업은 불황이 걷힐 때 힘찬 성장을 구가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는 결국 회생치 못하고 경쟁에서 탈락되는 것이 보통이다.

새틀짜기에 있어 성패의 차이는 무엇보다 정부와 기업을 이끄는 사람들의 비전과 추진력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부 부문의 큰 비전과 큰 결단은 필수적이다.

구습을 타파하기 위해 정부운영의 새로운 헌장 (憲章) 을 내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난 91년 존 메이저 영국 총리는 영국 경제의 회생을 위해 정부가 먼저 최고 품질의 공공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시민헌장을 선포했다.

이는 단순히 정부기관의 서비스 개선 차원이 아니라 정부의 모든 정책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과 새 시대의 요구를 담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은 너무도 혁명적이어서 실현 가능성이 의심되기도 했으나 그의 집권중 대부분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정부 공기업의 과감한 민영화, 주요 정부 업무의 대폭적 민간이양, 정부내 기관끼리의 광범한 경쟁, 강력하고 독립적인 감사제도, 그리고 합리적이고 포괄적인 사회구제제도 등을 포함하고 있는 시민헌장은 정부가 국민에게 반드시 이룩하겠다고 약속한 일종의 계약문건인 셈이다.

불황때의 정책이 자칫하면 경기부양책과 실업자 구제 정도의 소극적 수준을 못벗어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는 국민의 인기에 연연하고 정권 재창출에 급급할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강력한 지도자를 갖고 미래의 국운을 걱정하면서 확실한 가치관을 통해 국정을 운영하려는 유능한 정부의 경우 불황이 결코 개혁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지 못한다.

유장희(이화여대교수.국제대학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