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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변씨가 승희의 좌판으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흘러간 다음의 일이었다.

한쪽 볼이 복숭아를 물고 있는 것처럼 퉁퉁 부어 올랐고, 오른 손에는 난데없는 붕대까지 감겨 있었다.

손을 아래로 내리면 통증이 심하기 때문에 붕대로 팔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장터 한 바퀴 휘 돌아보고 오겠다던 사람이 바람 빠진 축구공 몰골로 나타나자, 승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자초지종을 듣자고 구슬러도 보고 윽박지르기도 하였지만,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입을 열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 지경된 화근이 변씨 자신에게 있었다는 짐작이 가능한 것이었다.

타관을 주문진처럼 여기고 일면식도 없는 난전꾼과 더불어 몸싸움을 벌였다가 입은 부상이 틀림 없었다.

그나마 면목은 있어서 길 건너편 장터 들머리에 자리잡은 황태좌판에서 눈치 챌까 먼저 승희 좌판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손으로 하늘가리기였다.

승희 좌판이 궁금했던 태호가 왔다가 찌그러진 과일상자 위에 측은한 몰골로 앉아 있는 변씨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러나 태호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변씨의 부상이 깊든 가볍든 그것이 문제될 것이 없었다.

변씨의 꼴같잖은 처신이 나이 값을 못했던 것에 연유했다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에 울화부터 치밀었다.

바람잡이 노릇을 단골로 하고 있어야 할 위인이 폭력배들처럼 장터바닥에서 싸움질이나 하고 다닌다는 것이 너무나 밉살스러웠다.

그래서 변씨를 보았으면서도 내색도 않고 좌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철규에게도 변씨를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변씨는 변씨대로 아는 척도 않고 매몰차게 돌아서는 태호의 성깔이 눈에 거슬렸지만 체통이 이지러진 지금에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오늘 벌어진 불상사의 과실은 모두가 눈에 도깨비가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자위하려 하였지만, 그럴수록 요사이 들어 문득 문득 느끼곤 하였던 쇠퇴한 근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가슴만 스산한 것이었다.

좌판으로 돌아온 태호의 기색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으나 철규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승희의 좌판으로 갔다온 이후였기 때문이었다.

승희와 연유된 일에는 될수록 모른 척하기로 작정한 지 오래였다.

태호는 좌판 뒷전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고, 철규는 그가 내려놓은 핸드 마이크를 집어들었다.

어얼씨구 넘어간다/저얼씨구 넘어간다/무슨 타령에 넘어가나/장타령으로 넘어간다/원산장을 보려다/원통해서 못 봤소/딸깍딸깍 게다짝/펄럭펄럭 하오리/눈꼴 사나워 못 보고/경치 좋다 송도원/달이 떠서 송월관/맛이나 좋아 개장국/한 그릇 사서 먹자다/절커덕 소리에 돌아보니/키다리 왜놈 순사라/소주나 한 잔 먹자고/우측 방에 들어가니/갈보 갈보 왜갈보/보기 역겨워 나왔소/잘한다 잘한다/저얼씨구 잘한다.

담배를 입술에 물고 가당찮은 철규의 장타령을 듣고 있던 태호의 입이 비쭉 하였다.

시큰둥해 있던 태호도 그러나 철규의 등줄기에서 땀이 배어나는 꼴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빼앗듯 마이크를 넘겨 받으면서 뇌까렸다.

"선배, 승희씨 좌판으로 가 보세요. 대선배께 보여주는 꼴이 가관입디다. " "무슨 소리야? 가관이라니?" "나한테 물어볼 거 없죠. 가서 선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조처를 취해야겠죠. "

"형님이 승희하고 다퉜단 얘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가보라니깐 그러네요. " 언성을 높이는 태도가 눈에 거슬렸지만, 승희가 좌판을 벌였다는 골목으로 얼른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철규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승희의 좌판이 있다는 골목 안쪽 모퉁이를 막 돌아가고 있는 사내의 뒷모습이 윤종갑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러나 철규는 혼자 불쑥 웃었다.

하루 종일 더위가 푹푹 찌는 휘장 아래에서 목청이 쉬도록 싸구려를 부르며 보낸 피로감이 도깨비를 불러들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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