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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업은 지배구조 재편 중] 5. 한국형 지배구조를 찾아서(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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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기업지배구조 개편은 국내 기업들에도 발등의 불이 됐다. 국내 3위 대기업집단의 지주회사인 ㈜SK가 지난 3월 주총에서 영국계 펀드인 소버린의 경영권 도전을 받았다. SK는 국내은행 등 우호지분의 도움으로 경영권을 지켰지만 내년 주총이 벌써 걱정이다.

최근에는 삼성그룹의 중간 지주회사격인 삼성물산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 가능성이 제기됐다. 헤르메스 등 외국계 펀드 세곳의 지분이 삼성 측 지분을 추월했다.

기업들은 이런 변화에 민감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경영권 문제가 투자 위축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며 "출자총액제한 제도의 폐지 등 무언가 대응할 수단을 달라"고 요구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미국식 지배구조를 성급하게 도입했다"면서 "정부가 과거 고도 성장기 때는 기업 대주주들의 지분 분산을 적극 권장해 놓고 이제 와서 경영권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라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 한국형 기업지배구조는 과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 정부와 참여연대 등은 지금대로 계속 가면 된다는 입장이다.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은 "내.외국인의 국적을 구분해 자본을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는 견해를 누차 표명했다.

장하성 참여연대 경제민주화 위원장은 "누가 됐든 주주가치를 높이면서 투명하고 책임 있는 경영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도성 서울대 교수도 "국내 자본이 경영을 잘못해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하지 않았느냐"며 "외국자본도 경쟁을 유발하고 산업 효율성을 높인다면 문제가 될 게 없다"고 강조했다. 증시에서도 이미 외국인 비중이 시가총액의 40%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상황인데, 이제 와서 이런 흐름을 되돌릴 수단은 없다는 현실론이 우세하다.

하지만 현재 흘러가는 지배구조의 방향은 어긋난 것이며,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인천대 이찬근 교수는 "경제발전 과정에서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중남미는 세계적인 기업을 하나도 키워내지 못했다"며 "위험을 감수하며 길게 보고 투자할 이유가 없는 외국자본이 국내 기업을 손에 넣게 되면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르코 베흐트 브뤼셀 자유대 교수도 "기업들이 배당 등 단기 주주가치를 높이는 데만 관심을 두게 되면 장기적인 성장 능력을 해칠 수 있다"고 말했다.

서강대 노부호 교수는 더 현실적인 방안으로 "공시제도 등을 보완해 시장이 외국자본의 기업경영 능력을 검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미국의 경우 증권거래위원회(SEC)는 5% 룰(특정 기업 주식을 5% 넘게 취득했을 때의 공시)을 단순 투자 목적과 경영권 취득 목적으로 엄격히 나눠 경영권이 목적인 경우 누가, 어떤 이유로, 어떤 돈으로 주식을 취득하려 하는지 등을 자세히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의 폴 앤드 와이즈 법무법인의 앨릭스 오 변호사는 "미국에서 M&A를 시도하는 쪽이 5% 룰에 따라 시장에 공시할 내용은 거의 책 한권 분량"이라며 "이에 따라 M&A 공격을 받는 쪽은 상대방의 정체를 분명히 안 상태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대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5% 룰은 한마디로 공정한 게임의 룰을 만들기 위한 제도"라며 "한국에도 이 제도는 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은행 등 금융자본의 역할을 강조하는 시각도 있다. 독일이나 일본처럼 은행이 기업의 실질 주주로서 역할을 하면 적대적 M&A에 따른 경영권 위협은 물론 대주주의 전횡도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찬근 교수는 "이제 와서 외국자본을 차별하는 유럽식 경영권 방어장치를 도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라며 "은행이 주요 기업의 안정 대주주로서 장기적으로 지분을 확보하고 경영에도 적극 참여하는 게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 스웨덴처럼 정부와 재계.노조 등이 사회적 대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정승일 국민대 겸임교수는 "기업은 경영성과의 사회 환원과 과감한 투자, 고용 창출 등을 통해 국민에게서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며 "그러면 단순한 기업지배구조 차원을 넘어 경제.사회적 지배구조 논의를 통해 자연스럽게 경영권 방어 수단들을 확보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방식이 됐든 기업들이 경영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누리 법무법인 김주영 변호사는 "기업들은 출자총액제한제의 폐지 등을 정부에 요구하기에 앞서 투명 경영을 위해 정말 노력하고 있다는 믿음을 시장에 심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외국 자본을 탓하기 전에 국내 기관투자가를 제대로 육성하는 것 또한 선결 과제"라고 강조했다.

김광기.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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