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체험구매' 확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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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아무리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도 혀끝에 대보지 않고서는 그 맛을 장담할 수 없는 법. 돈 한 푼 함부로 쓰기 어려운 국제통화기금 (IMF) 시대엔 물건이건 서비스건 직접 경험해 본 뒤 사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이런 소비성향에 맞춰 '일단 써보고' 구입하게 하는 업체들이 늘어나면서 생활 곳곳에 '체험시대' 가 열리고 있다.

선봉장은 후불제나 고객평가단제를 실시하는 가전사들. LG전자 홍보과 천성덕 대리는 "품질엔 나름대로 자신있지만 비싸서 판매가 부진한 제품들일수록 직접 써보게 하는 전략이 들어맞고 있다" 고 전한다.

지난해 탱크냉장고 후불판매제에 이어 대우전자는 올해도 수도권과 일부 지방에서 4백ℓ급 이상 냉장고 후불제를 실시했고, LG전자도 지난달 말부터 한달간 터보드림세탁기를 '무료사용 선택구입제' 를 통해 1천7백여대 팔았다.

이는 행사 전 월평균 판매대수인 7백50여대의 두 배를 넘는 것으로 반품률도 약1%에 불과했다고. 최근 대상자를 모집 중인 대우자동차의 '1년간 무료대여 사은행사' 도 여러 차종을 직접 타보게 함으로써 구매욕을 자극하는 전략이다.

어쨌든 소비자에겐 전적으로 유리한데다 아직까지는 사용 후 구매강제로 인한 피해고발사례도 없어 대상자 수를 제한하는 일부 제품의 경우 경쟁률도 센 편. 얼마전 한 정수기회사의 고객평가단제에 응모했던 주부 이영미 (40.서울강서구화곡동) 씨는 "무엇보다 광고나 다른 사람 얘기만 믿고 사기엔 값이 만만치 않아 망설이던 참에 직접 써보고 구입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고 평했다.

전통적으로 '맛보기' 를 해온 식품류는 더욱 적극적이 됐다.

'공짜' 시식회에 몰리는 이들이 많아진 것은 물론, 업체들도 거리나 백화점 시식회로는 모자라 개별 공략까지 나서고 있는 것. 대상㈜ 홍보실의 김상우 대리는 "학교급식용으로 대량판매가 가능한 냉동식품의 경우 신제품이 나오면 각 학교 영양사에게 1회용 급식분을 시식용으로 보내주는 것이 관례화됐다" 고 설명한다.

또 주부 박재홍 (43.인천시부평구산곡동) 씨에 따르면 "현관 문앞에 광고전단과 함께 시식용 두부 한 모가 담긴 비닐봉지가 달려있기도 한다" 고. 두부.콩나물 등을 재배.판매하는 회사가 아파트 한 동 전체에 판촉물로 돌린 것이다.

생활용품만이 아니다.

문화센터나 일부 학원에선 3~4개월짜리 일부 강좌들을 첫날과 마지막날 강의는 청강을 할 수 있게 했다.

강좌가 시작된 후에도 1주일 이내엔 환불이 가능해진 것도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라는 뜻. 이같은 변화는 취업에서도 엿보인다.

'완전 채용' 이 전제돼 있지 않은 인턴사원제도는 크게 보면 같은 맥락. 소비자 격인 각 기업들이 공급자 측인 취업예비생들의 능력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지난 4월 취업정보지 리크루트가 전국 12개 대학 98년 졸업자 및 졸업예정자 5백 명에 대한 조사에서 '정규직 전환이 불투명해도 일단 인턴사원으로 근무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다' 는 이가 48.8%나 된 반면 '근무하지 않겠다' 는 이는 13.9%에 불과했다.

새 아파트 주변의 인테리어업자들이 입주를 전후해 공개하는 일명 '보여주는 집' 도 '실감나는' 간접체험으로 소비를 유도하는 방법. 새로 인테리어공사를 하려는 입주자에게 총 공사액의 60~70% 가격에 시공을 해준 뒤 일정 기간 다른 입주예정자들이 언제든 구경할 수 있게 한 것. 주변에 시공대상자를 희망하는 집이 많아졌다는 주부 김경희 (32.서울서대문구연희동) 씨는 "IMF시대에 간접체험대상이 돼주는 대신 공사비를 줄일 수 있고, 다른 입주예정자들은 단순히 팜플렛이나 '모델' 하우스가 아닌 실제 생활공간을 볼 수 있어 관심이 높다" 고 말했다.

이런 '체험시대' 엔 '얌체족' 도 있기 마련. 문화센터의 경우 노래강의 공개청강만 골라 다니는 이들도 많다고. 하지만 '백문 (百聞) 이 불여일견 (不如一見)' 의 진리를 앞세운 마케팅전략은 소비자.공급자에게 호응이 커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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