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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선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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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지금이야 돈이 없어서 죽어가는 환자가 드물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항생제 주사 한 대면 살 병인데도 병원 문턱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아주 고단했던 시절이 있었다.

장기려 선생은 그런 시대를 살다간 의사였다. 선생은 1911년 평북 용천에서 출생했다. 32년 서울대 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한 뒤 평양의과대학·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내다 50년 12월 월남했다. 북에 아내와 5남매를 남겨둔 채. 전쟁통에 부산에 그가 세운 복음병원은 행려병자로 넘쳤다. 절대빈곤 시절, 병원비를 제때 내는 환자들이 얼마나 됐을까. 그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기꺼이 자기 돈을 댔다. 그러다 보니 그의 지갑은 늘 가벼웠다. 돈이 떨어졌을 때 퇴원하지 못한 환자를 야밤에 탈출시켜 준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을 성공한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이기도 했다. 그는 잘나가는 의사였지만 결코 부자로 살지 않았다. 평생을 자기 집 한 칸 갖지 못한 채 살다가,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병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치료한 큰 의사였던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대학병원 흉부외과에 레지던트가 없어 난리다. 이러다간 30년쯤 뒤 심장수술을 외국 가서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소리가 의사들 사이에 나올 정도다. 이런 세태를 반영이라도 하는 것일까. 얼마 전 인터넷을 검색하다 네티즌들의 댓글을 보고 쓴웃음이 절로 났던 기억이 새롭다. “27살 7급 공무원과 30살 흉부외과 레지던트, 누가 더 비전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공무원, 연금 있고 일정한 생활 보장되고 토·일요일 휴무 보장되고… 흉부외과 레지던트요, 개업은 생각할 수 없고 매일 야근이고, 억대 연봉은 글쎄…” “흉부외과가 돈 많이 번다고요? 무슨 소리, 피부과·안과·성형외과는 대박, 흉부외과는 쪽박.”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네티즌들이 없는 말 억지로 지어내지는 않았을 테고, 돈이 된다는 일부 진료과는 레지던트 지원자가 몰리고, 그렇지 못하다는 흉부외과는 지원자가 거의 없어 의료 공백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다.

선생이 이런 댓글을 보았다면 뭐라 하셨을까.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자신은 비우고 없는 이들을 위해 살다간 그분의 가르침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에 많은 부자들이 살다 갔지만 가지고 갈 것이 많아서 행복했다는 부자를 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지난해 타계한 박경리 선생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고 했을까.

필자가 의사라서 의사를 두둔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는 선생을 닮고자 하는 훌륭한 의사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가진 게 너무 많다”며 평생을 무욕으로 일관했던 고 장기려 선생님, 말년에는 기거할 곳이 없어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 옥상 20평 옥탑방에서 생을 마감했던 그를 떠올리며 부끄러움이 앞서는 건 나만의 생각일지….

박국양 가천의대 심장외과 교수

◆약력=서울대 의대 박사, 인제대 서울 백병원 흉부외과 조교수, 애리조나대 의대 심장센터 연수, 세종병원 흉부외과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