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5.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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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한철규가 주문진으로 돌아온 것은 이튿 날 오후였다.

그동안 변씨는 문밖 출입도 않고 꼬박 죽치고 앉아 철규를 기다렸다.

열흘이 넘도록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던 위인이, 이웃 나들이를 핑계하고 외입질하고 돌아오는 반죽 좋은 계집처럼 열적은 표정도 없이 불쑥 얼굴을 디미는 거동을 보는 순간, 변씨는 가라앉았던 울화통이 또다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명색 한씨네 행중의 행수로 자처하는 위인의 행동이 그처럼 경솔하고 분별 없어도 되는 것일까. 스스로의 발등을 찍고 싶을 정도의 모멸감도 없지 않았지만, 일단 약속을 한 이상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변씨는 여행가방 하나 가진 것 없이 홀가분한 차림새로 방으로 들어서는 철규를 노려보았다.

방으로 들어와 좌정한 철규는 주머니를 뒤적여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변씨에게 내밀었다.

선물 한 가지 마련 없이 빈 손으로 돌아왔다는 뜻도 그 한 개비의 담배에는 담겨 있었다.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댕겨주는 철규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끓어오르던 부아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오히려 그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태호가 오죽 따끔한 독설을 퍼부었으면 철규가 말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을까. 가볍게 지나쳤더라면 아무런 풍파도 없었을 텐데, 태호가 얼굴을 들 수 없도록 퍼부었던 것이 원인이 되었을 터였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가더라고 뛰쳐나간 김에 서울에 두고온 여식 (女息) 도 만나고 성민주라는 여자도 만나고 왔다면, 크게 죄책 가질 것도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못난 아우 보듯 용서하십시오. 못난 아우였다면 진작 돌아오지도 않았겠지. 오래 지절거릴 것 없이 방파제로 나가서 낮술이나 한잔 하자구, 두 사람은 집을 나와 선착장의 난전에서 횟감 한 접시와 소주 몇 병을 사들고 방파제 끝머리로 나갔다.

대중없이 내린 비 때문에 시선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은 눅눅한 시멘트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대책 없이 마주 앉았다.

파도에 밀린 물보라가 방파제를 거침없이 뛰어넘어 두 사람이 마주 들고 있는 소주잔을 간단없이 흔들어댔다.

선착장 근처의 구멍가게 앞에서 두 사람이 방파제를 걷고 있는 모습을 처음부터 훔쳐보고 있었던 봉환이와 태호는 우산을 들고 일어섰다.

때마침 비가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는 구실이 생긴 셈이었다.

비는 하루에도 두서너번씩이나 그쳤다가 다시 내리곤 했기 때문에 겨드랑이에 우산을 끼고 산다 해도 옷은 어느새 물걸레가 되곤 했다.

우산을 받쳐 든 두 사람이 방파제 들머리에서부터 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변씨가 턱짓하며 중얼거렸다.

"저토록 착한 우리 동업자들 보라구…. 불쑥 나타나면 한선생 무안해 할까봐서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다가 우산 들고 뛰고 있잖아. 이토록 야박한 세상에 저런 진국들이 또 어디 있을까. 씨발, 돈 같은 건 못 벌어도 좋아. 저런 떨거지들 곁에서 숨쉬고 살 수만 있다면, 홀대를 당한다 해도 천행으로 생각하기로 했어.

인생살이 별 거 아니라구. 트집 잡기 좋아하지 않고, 질투하기 일삼지 않고, 남의 허물을 제 탓인 양 감싸주기를 좋아하는 저런 놈들과 동고동락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극락 아니겠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곳이 바로 깡패사회였는데…, 이것들이 배운 것이 짧아 정치한다는 작자들한테 이용당하고부터 그 전통이 무너지기 시작했지. 한선생 그거 알어?"

철규가 대답할 말을 궁리하는 동안 우산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합류한 것이었다.

철규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주잔을 봉환이와 태호에게 차례로 권했다.

봉환이가 바지 뒷주머니에 몰래 꽂아왔던 소주병을 신문지 위에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가 워낙 높게 날았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그들 네 사람의 형용이 곧장 파도에 떠밀려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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