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의 그린수기]44.지치고 나약해 지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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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미국이나 영국은 어딜 가나 공원이 있고 잔디가 깔린 들판이 있어 골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잔디를 조성해놓아도 밟을 수가 없고 감상만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에서 연습을 할 때 가장 아쉬운 것은 잔디 위에서 연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내가 쇼트게임에 약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한다.

비거리는 미국에 와서도 뒤지지 않는데 쇼트게임은 늘 잔디밭에서 뒹굴며 자란 선수들을 하루 아침에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꿈은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골프스쿨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근사한 골프장이 딸린 골프스쿨이다.

마음이 지치거나 나약해질 때 나는 그런 골프스쿨을 머리 속에 그리며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곤 한다.

'선수들을 아버지로부터 떼어내 기숙사 생활을 하게 하면 어떨까. 골프는 정신력이 가장 중요한데 나처럼 공동묘지에도 데리고 갈까. 아니야 그건 좀 심했던 것같아…' . 이렇게 한참 공상의 나래를 펴다보면 힘이 솟구쳐 연습장으로 달려간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보다 더 잘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의 꿈은 개인적인 욕심에서 나온 게 아니다.

국민들과 팬들의 후원과 성원에 보답하려는 각오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 내가 우승을 못하자 어떤 분은 "제 실력을 못낸다" 며 "올해는 우승이 물건너간 게 아니냐" 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나는 당당히 말했다.

"나에게 슬럼프는 없다.

물론 경기가 잘 안풀릴 때도 있다.

내가 안풀릴 때 다른 선수들이 잘 풀리면 그들이 우승하는 것이다.

그들도 우승을 해야 하지 않느냐. " 꼭 돈이 목적이 아니듯 우승만이 목적은 아니다.

요즘에는 우승보다 팬들에게 멋진 경기를 펼쳐보이고 싶다.

더구나 나는 레드베터의 말대로 아직 미국의 골프코스를 익히는 과정에 있다.

원대한 꿈을 하나 하나 일궈나가는 나에게 슬럼프라는 것은 너무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단어다.

나는 요즘 팬들의 마음을 읽고 있다.

내가 필드에 서면 그들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느껴진다.

나는 팬들이 원하는 샷을 날린다.

미국 팬들은 '재미없는 우승자' 보다 멋진 플레이, 과감한 플레이를 펼치는 나를 더 원하고 있다.

이것도 팬들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다.

사람들이 타이거 우즈를 좋아하는 것도 그의 우승이 아니라 플레이가 공격적이고 과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의 세계는 이처럼 아마의 세계와 다른 것이다.

내가 가장 신경을 쓰는 팬들은 어린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먼저 달려와 사인을 받으려고 아무거나 내민다.

나는 꼬마 팬들에게 만큼은 일일이 사인을 해준다.

꼬마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오래도록 '코리안 박세리' 를 기억할 거고 그들은 영원히 나의 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골프는 긴 안목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앞으로 가야할 길이 아득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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