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에도 맞선 시골의사, 미 의료개혁 해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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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폭풍에 진료소가 부서져도 자리를 지켰던 시골 흑인 여의사가 미국 공중위생 담당 최고 수장 자리에 오르게 됐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장관급인 연방 공중위생국장에 앨라배마주에서 19년 동안 빈민 진료활동을 벌여온 레지나 벤저민(52·사진) 박사를 지명했다. 공중위생국은 미국의 공중보건위생 시스템을 총괄하는 기관이다. 흡연·비만·운동 등과 관련한 보고서도 발간한다. 벤저민이 의회 인준을 통과할 경우 미국 최초의 흑인여성 공중위생국장이 탄생한다.

벤저민은 1990년부터 앨라배마주 시골 어촌마을인 베이유 라 바트레에서 주민들의 건강을 지켜왔다. 그는 주민 2315명 중 40%가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할 정도로 열악한 시골 마을 곳곳을 진흙이 잔뜩 묻은 픽업 트럭을 타고 누볐다. 그의 노력으로 이곳 주민들은 대도시 못지않은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2005년)와 조지(1998년)가 이곳을 덮쳤을 때는 벤저민의 진료소도 파괴됐다. 화재까지 발생했다. 벤저민은 그러나 환자들의 진료기록을 햇볕에 말리고, 카펫을 비누로 청소하는 악전고투 속에서도 문을 닫지 않고 환자들을 돌봤다. 주민들도 발벗고 진료소 재건에 나섰고, 2005년에는 진료소가 물에 잠기지 않도록 더 높게 벽을 쌓았다. 그에게 진료를 받았던 한 여성 주민은 7달러가 든 돈 봉투를 건넸다. 벤저민은 야간에 응급실과 사립요양원에서 일하며 진료소 운영자금을 벌었다.

그는 새우잡이가 주된 생계수단인 이 마을에 동남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이 몰려오자 이들의 진료를 위해 베트남계 미국인 집성촌으로 통역자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벤저민은 이 같은 노력을 인정받아 2008년 하버드대 공공리더십 센터와 시사 잡지 ‘유에스 뉴스 & 월드 리포트’가 공동 선정한 ‘올해 미국 최고의 리더 24인’에 선정됐다. <본지 2008년 11월 29일자 8면> 또 ‘존 앤드 캐서린 맥아더 재단’은 지난해 가을 벤저민에게 50만 달러를 수여했다. 벤저민은 이 돈을 모두 빈민 진료활동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오바마는 13일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벤저민은 자신 앞에 놓인 거대한 장애물들을 모두 극복하고 미국에서 최선의 의료체계가 무엇인지, 또 환자들을 위한 의사의 희생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줬다”며 연방 공중위생국장 지명 이유를 설명했다.

AP 등 외신보도에 따르면 벤저민은 앨라배마 주립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그의 가족은 질병의 고통 속에서 모두 숨졌다. 벤저민의 아버지는 당뇨와 고혈압, 담배를 즐기던 어머니는 폐암, 하나밖에 없는 오빠는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로 숨졌다. 이 같은 가족사를 의식한 듯 벤저민은 13일 “내가 내 가족의 과거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 미국인들의 건강을 개선하려는 노력에서는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예방 가능한 질병과의 전투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벤저민은 뉴올리언스에 있는 튤레인 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공부해 학위를 받기도 했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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