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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노무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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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MB노믹스의 두 축은 감세와 규제완화다. 세금을 깎아주면 소비가 살아나고, 규제를 풀어주면 투자가 활발해져 경제가 좋아진다는 논리다. 기업에 우선순위를 둔다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불린다. 그러나 요즘 정부·여당 안에서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다. 대신 그 자리를 ‘서민 프렌들리’가 차지했다.

앞장서서 고삐를 죄는 쪽은 한나라당이다. 여당은 지난달 29일부터 시·도별 국정보고대회를 열고 있다. 화두는 어디서나 서민이다. 주요 당직자들은 입만 열면 서민과 복지다. “우리 당과 정부가 당면한 최대 화두는 서민 살리기”(박희태 대표), “‘서민층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가 MB 정부의 철학”(장광근 사무총장), “올해 서민 복지 예산은 (역대 최대인) 74조7000억원이며 이게 바로 747정책”(김성조 정책위의장) 등등. 급기야 “본래 한나라당이 서민정당인데 몇몇 부자 의원 때문에 부자 정당 소리를 듣는다”(안상수 원내대표)는 말까지 나왔다.

여당이 이렇다 보니 정부도 못 이기는 척 따라간다. 강남 집값이 꿈틀거리자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강화했다. 규제를 통해 집값을 잡으려 해선 안 된다던 논리는 쑥 들어갔다. 종부세 폐지는 대충 없던 일로 넘길 분위기다. 정권 초만 해도 ‘노무현 대못’이라며 완전히 뿌리뽑아야 한다고 외쳤던 정부다. 그뿐이랴. 엊그제는 상속·증여세를 깎아주는 법안을 올해 처리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해만 해도 기업하기 가장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며 야심 차게 밀어붙였던 법안이다. 서민·영세자영업자에 대한 비과세·감면 혜택은 그대로 두고 고소득층이나 대기업에 대한 것은 선별해 줄이기로 했다. 야당의 ‘부자 감세, 서민 증세’ 공세에 밀린 탓이다. 이런 정책들만 보면 도대체 지금이 이명박 정권인지 노무현 정권인지 헷갈릴 정도다.

서민과 복지는 노무현 정권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입만 열면 서민이요, 눈만 뜨면 복지를 외쳤다. 이를 두고 ‘부자와 대기업 때려 서민 달래기’와 ‘퍼주기식 복지’라며 허실을 파헤치고 공격해 집권한 게 이명박 정권이다. 그걸 이 정권이 갖다 쓰려면 설명이 있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서민·복지와는 뭐가 어떻게 다른지, 그땐 안 된다던 게 지금은 어떻게 된다는 건지 국민을 납득시켜야 한다. 이제껏 웰빙 정당, 부자 정당 잘 하다가 갑자기 서민을 외친들 국민들이 곱게 믿어주기도 어렵다. 당장 정책을 만드는 공무원들도 죽을 맛이다. 과천의 한 공무원은 “지금까지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에 올인하다가 갑자기 서민으로 중심 이동을 하자니 헷갈린다”며 “아무래도 영세 상인 지원이나 고리사채 대책 등 노무현 정권의 정책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물론 서민 프렌들리란 방향 자체는 옳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와 함께 못 갈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서민 쪽으로의 중심 이동이 너무 빠르고 방법도 못 미덥다. 영세상가 살리기법, 카드수수료 줄이기법, 통신요금 줄이기법, 상조피해방지법, 악덕사채근절법 등 여당의 이른바 5대 중점 서민 대책은 노무현 정권의 ‘대기업 때리고 퍼주기식’ 서민·복지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쓸 돈은 한정돼 있고, 정책엔 우선 순위가 필요하다. 지금은 경제 위기 극복이 먼저다. 감세 효과로 투자가 늘고 경제가 살아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이제 걸음마 단계다. 지난 정권의 ‘대못 뽑기’도 못 마친 상황이다. 제대로 된 감세와 규제완화는 해보지도 못 했다. 잠깐 지지율이 오르는 맛에 퍼주기식 서민·복지의 유혹에 빠지는 건 또 다른 포퓰리즘이요, ‘백 투 더 노무현’이다. 자칫 비즈니스도 잃고 서민도 잃을 수 있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