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씨에게 남편이 말했다 “정년까지 회사 다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1호 04면

유한킴벌리 본사에 있는 ‘느티나무 그늘방’. 여직원 휴게실이지만 혈압 체크기와 발 마사지기, 소파·침대 등 임신부를 위한 배려가 곳곳에 스며 있다. 벽면에‘Work &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오른쪽 아래 사진은 직원 회의실. 아이들 놀이방처럼 재미있고 편안한 분위기다. 신인섭 기자

서울 대치동 테헤란밸리의 한 회사에서 일하는 8년차 직장인 김주영(33·여) 과장. 지난 2년간 근무형태가 변화무쌍했다. 첫아이 임신기간이었던 지난해 1월 초까지는 오전 9시 반에 출근해 오후 6시 반 퇴근했다. 무거운 몸으로 복잡한 전철 출퇴근길을 다니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후 6개월 동안은 출산휴가(3개월)와 육아휴직(3개월)을, 그리고 최근까지는 오전 8시에 출근해 5시에 ‘칼퇴근’을 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해 18개월짜리 손녀를 봐주시는 시부모님의 고생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다.

아이 낳기 좋은 기업, 유한킴벌리에선

김씨는 조만간 둘째 아이도 가질 예정이다. 이번엔 육아휴직을 1년간 사용할 생각이다. 첫아이를 키워보니 젖먹이 아이 때 엄마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이 회사의 ‘별종’이 아니다. 결혼하고 임신한 여직원 중 극히 평범한 경우다. 김씨는 “남편이 수시로 ‘정년 될 때까지 회사 다녀라’고 한다”며 “가족 친화를 우선시하는 회사의 배려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김씨가 다니는 회사는 건강위생용품 제조사인 유한킴벌리다. 이 회사에서는 비정규직 문제와 정리해고, 구조조정이란 말을 실감할 수가 없다. 생산직과 사무직 직원 중 비정규직은 단 한 명도 없다. 만 57세 정년이 보장돼 있다. 덕분에 이직률은 0.2%에 불과하다. 생산직원들은 4일을 일하고 4일을 논다. 사무직 중 여성 직원 비율은 40.2%. 출산 후 3~12개월간 쉬는 육아휴직도 일반화됐다. 육아휴직을 하더라도 고용보험센터에서 나오는 50만원 외에, 회사가 매달 20만원을 더 준다. 덕분에 지난해 말엔 보건복지가족부 선정 ‘가족친화인증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언뜻 ‘한가한’ 경영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적은 정반대다. 지난해 매출액 1조221억원에 1473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매출액 대비 이익 비율은 14.41%로 제조업 평균(5%)의 세 배 수준이다. 부채비율도 21.9%다. 보유한 현금성 예금자산을 고려하면 사실상 무차입 경영이다.

정년 57세 보장, 이직률 0.2%
유한킴벌리는 직장 여성의 ‘이상(理想)’이다. 제조업체의 특성상 전체 직원(1700명) 중 남녀 비율은 84대 16이지만, 본사 사무직(400명) 중 여성 비율은 40.5%에 이른다. 여성의 임원 비율도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2005년 3.5%에 불과하던 여성 임원 비율은 지난해 16.6%였다.

손승우 홍보부장은 “5~6년 전부터 사무직 신입사원 중 여자의 비율이 급속하게 높아졌다”며 “대학생들 사이에 여자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도 다니기 좋은 직장으로 알려졌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오전 7~10시 사이에 출근시간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한 ‘시차출퇴근제’는 1994년 도입됐다. 어린 아이가 있는 여직원이 주로 이용하지만, 퇴근 후 영어 학원이나 대학원을 다니는 남자 직원들에게도 요긴한 제도다. 본사 직원 470명 중 60명이 이용한다. 대치동 본사 14층과 17층에는 ‘느티나무 그늘방’이라는 이름의 여직원 휴게실 겸 수유실도 있다. 침대뿐 아니라 소파와 안락의자, 발 마사지기 등 여성을 위한 다양한 시설을 마련해 놨다.

김주영 과장은 “회사가 제도를 만들어 놨다는 것보다는 그 제도를 실제로 쓸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윗사람이나 동료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육아휴직이나 시차 출퇴근제 등은 쓸 수 없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회사에서 직원들을 배려해준 만큼 직원의 애사심과 동료애가 높아지기 때문에 휴직 등으로 인한 산술적인 시간 손실이 업무 차질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남자 직원 중에서도 육아휴직을 떠난 사람이 생겼다. IT서비스실의 정대근(31)씨는 지난 5월 초 첫째 아이 출산 후 힘들어하는 맞벌이 아내를 위해 3개월간 휴직계를 냈다.

생산성 오히려 크게 늘어
지방공장의 생산직은 혜택이 더 많다. 일단 근무 형태가 4일 동안 매일 12시간씩 근무하고, 이후 4일을 쉬는 방식이다. 근무일 동안은 노동시간이 다소 길지만, 이후 4일 연속 쉴 수 있으니 마치 휴가처럼 여행을 떠나거나 공부를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그간 3조 3교대를 거쳐 하루 8시간씩 7일을 일하고 이틀을 쉬는 4조 3교대 형태로 공장을 운영해 왔으나, 97년 노조 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4조 2교대로 근무형태를 다시 바꿨다. 4조 3교대와 4조 2교대는 근무형태만 바뀌었을 뿐 근로자 수와 근로시간은 동일하다. 군포공장의 오준영·원선미 부부 직원은 ‘4-4제’를 육아에 이용하는 경우다. 아내와 남편이 번갈아 가며 4일씩 아이를 본다. 맞벌이 부부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육아 문제가 이들 부부에겐 ‘해당 사항 무(無)’다.

오씨는 “부모 손에서 자란 덕분인지 아이가 아주 잘 커주고 있다”며 “집과 회사에서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아내와도 서로 화젯거리가 통해 좋다”고 말했다. 생산직 여직원은 출산 전에도 2개월 동안 산전휴직을 할 수 있다. 임신부를 도덕·보건상 유해하거나 위험한 사업장에 배치하는 것도 제도적으로 금지된다.

연달아 많이 쉬다 보면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결과는 정반대다. 99년 시간당 2만9000개 수준이던 생산성이 계속 상승해 지난해에는 4만6000개로 크게 늘어났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