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추 위원장은 의회민주주의 거꾸로 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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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우려대로 시한을 넘겨 ‘비정규직’ 사태가 터진 것은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장애를 다시 한번 보여 준 것이다. 먼저 당정의 부실이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비정규직 고용 시한의 해결 방안에서 오랫동안 이견을 보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국민에게 호소하고 야당·노동계를 설득하는 데도 한계를 보였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야당이다. 야당은 이번에도 다수에 불복하고 국회의 순리적인 절차를 거부하는 고질적인 행태를 보였다.

쟁점이 무엇이든 주요 법안은 국회에 제출되면 상임위에 상정되어야 한다. 정당은 법안심사소위를 중심으로 타협안을 논의하고 이 과정에 이익단체·전문가의 의견이 개진될 수 있다. 지금의 비정규직 법안도 열린우리당 집권 시절 이런 과정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당 소속인 추미애 환경노동위원장은 개정법안이 제출된 4월 1일 이후 법안을 상정하지 않았다. 그는 3당이 합의해도 노동계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비정규직 2년 시한 유예안’을 상정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는 정치권만의 합의는 사회적 합의라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규직 중심인 양대 노총의 이해관계가 반드시 비정규직과 같지 않은데도 그들을 ‘합의’의 절대적 존재로 간주했다.

국회법에 따르면 법안 상정은 위원장의 권한이다. 교섭단체 간사들과 협의하도록 돼 있지만 최종 결정은 위원장 몫이다. 추 위원장은 이 고리로 법안 심의의 문을 잠가 왔다. 어제 한나라당 의원만 모여 법안을 상정했지만 적법 시비에 올라 있다. 국회의장이 법안을 본회의에 직권 상정할 수도 있지만 의장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법안 처리는 요원해진다. 추 위원장이 내세운 ‘사회적 합의’라는 건 의회정신과 어긋나는 것이다. 사회적 갈등을 이해당사자를 대신하여 조정하고, 타협하고, 결정하라고 있는 게 국회요, 국회의원이다. 추 위원장의 논리는 각종 이익단체가 합의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것으로 대의민주주의 원리에 배치될 뿐 아니라 국회의 직무유기에 해당될 수 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미디어법엔 언론계, 집시법엔 시위단체, 교육법엔 학교·학부모, 국방 관련법엔 군인, 세금 관련법엔 납세자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민주당은 미디어 관련법의 상임위 상정을 오랜 기간 물리적으로 막기도 했다. 겨우 상정되니 이번에는 여론조사를 해야 한다며 막고 있다. 여론조사나 사회적 합의로 할 거면 대의민주주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의원도 여론조사나 유권자 대표의 합의로 뽑을 것인가.

의회민주주의 원리를 무시하는 상임위원장으로 인해 비정규직 법안 심의가 지연됐다. 그로 인한 사회적 손실은 가늠하기 어렵다. 개발과 환경보호의 복잡한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한 스님의 ‘도롱뇽 소송’ 때문에 경부고속철도가 한참 지연됐고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 두 사례가 닮은꼴이다. 국회는 상임위원장이 합리적이지 못한 이유로 법안을 상정하지 않을 경우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