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박세리 드라마를 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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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연장 두번째 홀, 버디 퍼팅이 홀 컵으로 빨려들어가는 순간 박세리는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억눌렀던 감정을 울음으로 터뜨렸다.

나이답지 않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해서 포커 패이스, 심지어 '터미네이터' 로 불리던 그도 어느새 앳된 루키로 되돌아가 있었다.

세계여자골프 역사를 다시 쓰게 한 박세리의 쾌거는 한편의 감동의 드라마였다.

연장 18홀 물속에서 맨발로 그는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었다.

골프의 천재 타이거 우즈는 골프와 인종에 대한 미국인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돈 있는 백인들에 국한된 골프의 벽을 그는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평균 3백20야드가 넘는 그의 드라이브 샷은 골프 스윙의 물리학적 잠재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악명 높은 마스터스 난코스에서 프로데뷔 첫해 최연소에 최저타, 2위와의 최대 점수차를 벌리며 골프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런 그도 첫 해 메이저대회 2연승은 이루지 못했다.

박세리는 여기에다 차원 하나를 더 보탰다.

땅땅하고 왜소한 체구에서 뿜어내는 호쾌한 드라이버 샷은 여성골퍼와 동양인의 한계를 다시 한번 생각케 만들었다.

이른바 '황색돌풍' 은 침체에 빠져 있는 미국 여자프로골프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동양계와 동양인끼리의 미국여자오픈결승은 하나의 '사건' 이었다.

스포츠 전문채널 ESPN이 온종일 달라붙고, 월요일임에도 3만 가까운 관중이 몰려들었다.

골프를 모르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모두가 TV 속으로 빨려들어간 한국의 새벽이었다.

박세리의 쾌거는 그의 인간승리를 넘어 한국과 한국인의 저력과 가능성을 국제사회에 떨쳐 보였다는 점에서 더 없이 소중하다.

'박세리는 가장 성공한 벤처기업' '한국이 만들어낸 베스트 브랜드' 라는 바깥의 평가가 이를 입증한다.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로 경제적으로 찌들고, 월드컵축구의 참패로 한국의 기가 극도로 꺾여 있는 상황에서 이 이상의 선물도 드물다.

농구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은 스포츠마케팅으로 '조던 1인산업' 을 일구었다.

'박세리 1인산업' 의 태동도 멀지 않았다.

그러나 '20세의 골프여왕' 은 하루아침에 태어나지는 않는다.

인재를 일찍부터 발굴하고 기업 및 사회적 지원으로 공을 들인 인내의 산물이다.

박세리의 성공은 우리에게도 그같은 저력과 사회적 기반이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한 또 하나의 쾌거다.

제2, 제3의 글로벌 슈퍼스타 창출에 적극 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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