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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서머타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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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전두환 정권 시절, 흔히 서머타임이라고 부르는 일광절약시간제(daylight saving time)가 잠깐 실시된 데에는 서울 올림픽이 큰 이유를 제공했다. 방송 주간사인 미국 NBC로부터 한 푼이라도 중계권료를 더 받기 위해 인기 종목의 경기 시간을 미국의 밤 시간대로 맞춰야 했고, 그러려다 보니 한 시간이라도 더 시차를 조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올림픽을 치른 이듬해인 1989년 서머타임은 슬그머니 폐지됐다.

당시의 서머타임은 전혀 뜻밖의 무대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역사적’ 소임을 했다. 다름 아닌 87년 6월 항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 갓 실시된 서머타임제로 인해 오후 8시가 돼도 날은 여전히 환했다. 굳이 요즘 식의 촛불시위를 할 필요도 없었다. 시위 인파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늘어났다. 퇴근길의 직장인들이 합류한 때문이었다. 이른바 ‘넥타이 부대’의 가세는 6·29 선언을 이끌어 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07년 영국의 건축가 윌리엄 월릿이 ‘일광의 낭비’란 글에서 주창한 서머타임은 말 그대로 햇볕을 아껴 쓰자는 제도다. 가령, 오늘 아침 서울의 일출 시간은 오전 5시14분, 대다수 시민이 아직 이불 속에 있을 시간이다. 만약 시곗바늘을 1시간씩 뒤로 돌린다면 그만큼 기상 시간을 앞당기게 될 것이고, 1시간 일찍 잠들면 그만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게 월릿의 셈법이다. 요즘 말로 하면 정부가 게으른 국민을 1시간씩 일찍 깨워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제도다. 세계 86개국에서 시행 중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 서머타임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아이슬란드뿐이라고 한다.

한국과 일본의 정상이 만나는 자리에서 공동 서머타임이 화제에 올랐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일본과 한국은 시차가 없기 때문에 함께한다면 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나라의 근로 환경을 고려하면 결국 노동시간 연장으로 이어질 뿐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겠지만, 양국 정부 차원에서 공동 서머타임 제도를 전향적으로 검토해 볼 때라고 생각한다. 한 조각의 햇볕 에너지라도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을 만큼 자원 절약이 대세인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한쪽이 먼저 시행해 일의대수(一衣帶水)에 불과한 현해탄을 건너면서 시곗바늘을 돌려야 하는 일이 생겨서는 곤란하겠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