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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문학' 작가 김원일씨 연애소설 썼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정말 이렇게, 이렇게 떠나면 되는 겁니까?" 여인은 펄떡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사내를 따라 나선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이, 자신의 삶이 지닌 숙명 탓에.

'불의 제전' '늘푸른 소나무' 등을 통해 분단문제 등 현대사의 아픔을 다루는 데 주력했던 중진작가 김원일 (56) 씨가 지난 열 달 동안은 구름 아래 도망친 옛 남녀를 좇았다. 그리고 작가생활 30여년 만에 처음 남녀의 사랑을 다룬 작품을 선보였다. 장편소설 '사랑아 길을 묻는다' (문이당刊) .

구한말 장성한 자식들이 있는 소리꾼 한량 서학중과 사내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늙은 참봉의 후실 사리댁이 주인공이다.

한마을에 살며 눈과 뜻이 맞아 야반도주, 화전 (火田) 살이를 시작하지만 이내 추적자들에 의해 서학중은 반 불구가 되고 활빈도에 붙들려가기까지 한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남녀는 일자리를 찾아 탄광촌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임신한 사리댁은 변변히 먹지 못해 눈이 멀기 시작하고 서학중은 병이 들어 고향 근방 친구 집에서 죽음을 맞는다.

비극적 결말을 맞는 것은 김씨의 문학적 성향 탓만도, 불륜의 사랑 때문도 아니다. 나라가 망해가는데 남의 여자나 가로챘다고 질타하는 친구에게 서한중은 당당히 말한다.

다른 이들이 나라에 바친 정성 못지않게 자신은 한 여인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고. 나이 마흔 일곱이 되도록 무위도식하며 살았지만 지난 몇 달은 그 사랑 때문에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았다고.

김씨는 "가볍게 스쳐가는 사랑이 아니라 숙명껏 자기 삶을 사는 모습" 을 그리고 싶어한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통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세속의 욕망과 갈등, 그 사랑에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치열한 삶을 보여주고 싶어한 것이다.

가을에 떠난 남녀가 이듬해 겨울 돌아오기까지, 김씨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을 영상인 듯 선명하게 옮기고 있다.

고어 (古語) 사전 한 권은 족히 될 정도로 잊혀져 가는 우리말을 많이 사용해서. 어느 나라 사랑인지 모를 젊음들이 판치는 요즘 우리 고유의 정서를 살리기 위한 장치 중의 하나다. 그 정서가 이 시대에도 남아 있는지는 독자들이 가려줄 것이다.

양지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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