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위치 코리아’ 아시아의 국제중재 중심 될 수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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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호 14면

국제중재는 국적이 다른 기업 간의 상거래 분쟁을 민간 전문가를 중재인으로 내세워 해결하는 제도다. 일종의 ‘민간 법정’인 셈이다. 중재 판정은 법원의 확정판결과 유사한 효력을 갖는다. 지난주 존 비치 국제상공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장과 얀 폴슨 런던중재법원(LCIA) 원장 등 국제중재 분야의 거물들이 대거 서울을 찾았다. 21~23일 열린 세 건의 국제중재 관련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중앙SUNDAY는 23일 한국의 국제중재 전문가인 법무법인 태평양의 김갑유(사진) 변호사와 비치·폴슨 원장과의 좌담을 마련했다. 김 변호사는 2007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런던중재법원 상임위원에 올랐고, 올해에는 역시 한국인 최초로 국제상사중재위원회(ICCA)의 위원으로 선출됐다. ICC 중재법원과 미국중재협회의 상임위원도 맡고 있다.

국제중재계의 두 거두, 존 비치 ICC 국제중재법원장-얀 폴슨 런던중재법원장

김갑유 변호사: 한국 독자를 위해 ICC 중재법원과 런던중재법원을 소개해 달라.

존 비치 ICC 국제중재법원장: ICC 중재법원은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중재기관으로 어떤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국제 민간조직이다. 국제상공회의소는 80여 개국의 상공회의소가 회원으로 가입한 국제조직으로 그 산하에 국제중재법원을 두고 있다. 중재는 당사자들의 합의에 따라 여러 국가에서 진행되는데 현재 전 세계에서 22개의 다양한 언어로 연간 700건 정도의 중재사건을 처리한다. 최근 홍콩에 사무국을 열고 아시아지역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

얀 폴슨 런던중재법원장: 런던중재법원은 런던에 본부를 둔 민간 국제중재기관이다. 이름은 런던중재법원이지만, 영국과 관계 없는 순수 민간기관이다. 법원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재판관들이 재판하는 법원이 아니라 중재인이 결정을 내리는 중재기관이다. ICC 중재법원과 달리 주로 영어로 중재를 진행한다.

김: 상사분쟁도 서비스 상품이다. 당사자가 어느 중재법정을 선택할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중재기관의 중립성이 중요하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ICC 중재법원이 프랑스인을 원장으로 뽑지 않고, 런던중재법원이 영국인이 아닌 외국인에게 원장을 맡기는 것도 개별 국가를 넘어서는 국제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아시아 중재기관인 싱가포르국제중재원(SIAC)도 최근 원장을 호주 사람으로 임명했다.

폴슨: 런던중재법원장뿐만 아니라 부원장이나 상임위원도 주로 영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맡고 있다. 35명의 상임위원 중 영국인은 3~4명에 불과하다. 최근에 새로 임명된 상임위원들도 한국·인도·파키스탄·미국·바레인·스웨덴·러시아 출신이다.

비치: ICC 중재법원은 80여 개국에서 120여 명의 상임위원을 뽑아 상임위원회(Court)를 구성해 중재법원을 운영한다. 상임위원회는 중재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중재판정문을 검토하는 등 핵심적인 일을 한다. 이런 상임위원회는 우리 중재법원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다.

김: 국제중재가 법원 소송보다 왜 유리한가.

폴슨: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국제중재는 중립성이 보장된다. 특정 국가의 법원이 하는 재판이 아니라 민간기관이 분쟁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둘째, 국제중재는 당사자들이 재판에서 판사 역할을 하는 중재인을 선택할 수 있다. 분쟁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전문성과 신뢰성·도덕성을 갖춘 중재인을 당사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다. 셋째, 절차도 당사자의 편의에 따라 합의할 수 있다. 중재 절차나 중재장소, 사용 언어 등을 모두 당사자가 선택할 수 있다. 넷째, 상사중재는 비밀이 보장된다. 중재가 비공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판정의 집행이 국제협약으로 보장돼 있어 법원 판결에 비해 집행하기 쉽다.

김: 국제중재 분야에서 한국의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

비치: 한국은 최근 아시아에서 국제중재가 가장 활발한 국가다. ICC 중재법원에서 한국 기업이 당사자인 국제중재 사건이 한 해에 40여 건에 달할 정도로 많다. 한국인이 중재인이 되거나 중재장소로 서울을 선택하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 국제중재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은 것 같다.

폴슨: 한국 기업과 한국 로펌의 국제중재 실무 능력은 글로벌 수준이다. 최근 한국 기업과 로펌이랑 일한 적이 있는데 국제 수준에 손색이 없었다. 중국·일본에 비해 국제기준을 도입하는 데 훨씬 적극적이고 수용 속도도 매우 빠른 것 같다.

김: 흔히 한국을 강대국에 둘러싸인 샌드위치 신세라고 한다. 그래서 어려움도 있겠지만 국제중재에서는 오히려 강점이 될 수도 있지 않나.

비치: 국적이 다른 당사자 간의 분쟁을 처리하는 국제중재는 중립적인 곳을 중재장소로 선택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아시아에서는 아직도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중재장소로 많이 선택되고 있지만, 동북아에서 한국도 중립적인 중재장소로 아주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중국 기업과 미국 기업, 미국 기업과 일본 기업 간의 분쟁에서 한국을 중립적인 중재장소로 선택할 수 있다. 한국은 동북아 다른 국가와 비교할 때 법률·법원제도가 선진화돼 있고 중재도 활발하며 국제중재에 관한 이해도도 높아 매력적이다.

김: 한국 법률시장이 이제 막 개방됐다. 외국법자문사법이 올 9월 발효되면 외국 로펌이 한국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서울이 국제중재의 아시아 허브가 되는 데 이런 분위기도 도움이 되지 않나.

폴슨: 그렇다고 본다. 국제중재는 법원 소송과 달리 어느 나라의 변호사든 자격에 제한 없이 자유롭게 당사자를 대리한다. 외국 로펌이 한국에 많이 진출하면 한국을 중재장소로 선택하는 사례도 많아질 것이다.

좌담 말미에 비치 원장과 폴슨 원장에게 각각 상대기관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지만 모두 즉답을 피했다. 놀랍게도 비치 ICC 중재법원장은 예전에 런던중재법원 부원장을 지냈고, 폴슨 런던중재법원장은 올해 중반 임기가 끝나면 ICC중재법원 부원장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했다. 국제중재 분야는 전문성과 중립성 측면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소수의 전문가그룹이 쥐락펴락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국제중재 마피아’라는 말이 나왔을까. 태평양의 김갑유 변호사나 김&장의 윤병철 변호사처럼 이런 그룹에 참여하는 토종 한국 변호사들이 늘고 있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국제중재가 느는 것은 한국 기업의 국제거래가 그만큼 활발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입 비율은 107%에 달한다. 중재에 휘말리지 않거나 분쟁이 생기더라도 이기는 비법은 없을까. 김 변호사는 “기업 내부의 의사결정시스템이나 문서관리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해야 한다”며 “실제 중재에서 의사결정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가 없다든지, 상대방에게서 받은 중요 서류나 e-메일이 보관돼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존 비치(John Beechey·56)
국제상업회의소 국제중재법원장.
영국 옥스퍼드대 출신 변호사로 영국의 세계 최대 로펌인 클리포드 챈스(Clifford Chance)에서 중재그룹장을 맡아 오다 2009년 초 ICC 중재법원장에 취임했다. 영국은 물론 세계의 대형 분쟁을 처리해 왔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재전문가로 꼽힌다.

얀 폴슨(Jan Paulsson·59)
런던중재법원장.
스웨덴 출신으로 미국에서 하버드대와 예일대 법대를 나왔다. 영국의 대형 로펌 프레시필즈(Freshfields)에서 중재팀을 이끌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500건이 넘는 국제중재 사건에서 기업 대리인이나 중재인 역할을 맡았다. 이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실무지침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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