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환란 그후1년]2.무너진 성장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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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방콕은 붐 타운이 됐다. 곳곳에 솟아 있는 크레인들과 한창 건축중인 빌딩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도로변에 즐비한 공장들이 그럴 듯해 보인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손에 휴대폰을 들고 벤츠를 몰며 최고급식당에서 식사하는 비즈니스 엘리트층도 태어났다. " 미국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S&P) 의 통화 (通貨) 분석관 캘럼 헨더슨이 최근 발간한 '위기의 아시아, 한국의 선택' 에서 묘사한 지난해 6월 방콕의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 방콕에서는 부도사태에 몰린 기업인들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거리마다 실업자 물결이 넘쳐 난다.

초호화판으로 지어진 빌딩은 입주자를 못 찾아 텅 비어 있다.

상점마다 '왕창 세일' 을 내걸고 손님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연 10% 안팎의 고도성장. 2~3%대에 불과했던 실업률. 머잖아 선진국에 진입한다는 벅찬 기대 - . 하지만 금융위기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지 1년이 채 안돼 누구나 굳게 믿었던 '아시아 성장의 신화' 는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금융위기가 시작된 이후 각국의 주가.환율 등은 아시아의 몰락을 웅변해 준다.

아시아 각국의 화폐는 '돈값' 이라는 측면에서 바닥까지 추락했다.

비교적 사정이 나은 대만.싱가포르의 통화가치는 미국 달러화에 대해 10%대의 하락률을 보이고 있으나, 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 등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국가들은 40~50%씩 가치가 떨어졌다.

사실상 모라토리엄 (지불유예) 상태로 경제가 마비된 인도네시아는 무려 83%에 이른다.

주가도 추락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태국 SET지수의 경우 1년 새 48%나 폭락해 지난 88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홍콩.싱가포르도 같은 기간중 40%대의 하락률을 보이고 있다.

금융불안은 곧바로 실물경제 붕괴로 번져 아시아 각국에서 1년 새 수만개의 기업들이 도산했다.

태국의 경우 지난해말까지 8천여개 기업이 문을 닫은 데 이어 올 들어서도 수천개가 도산물결에 휩싸였다.

정치.경제적 혼란이 겹친 인도네시아에서는 날마다 1백여개의 기업이 무너지고 있다.

기업도산은 위기의 심각성이 덜한 국가에도 그대로 전염되고 있다.

홍콩의 경우 지난해초 대형 금융그룹인 페레그린 그룹이 파산한 데 이어 캐세이퍼시픽 투자금융도 도산했다.

기업도산과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결과 과거 2~3%에 불과하던 아시아지역의 실업률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의 실업자수는 1천3백여만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이미 실업률이 20%가 넘는 상황에서 실업자는 연말까지 7백만명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태국도 지난해 2%에 불과했던 실업률이 올해는 7.3%로 올라갔다.

앞으로 2백40여만명이 직장을 잃을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의 주요 거리는 노숙자.실업자로 가득하고 고아원.양로원에는 부양가족을 잃은 어린이와 노인들로 넘쳐 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 (ILO) 는 최근 아시아 40억 인구중 10억명이 실업자 또는 실업자 가족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추산했다.

살인적인 물가상승은 아시아인들의 고통을 배가시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은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아시아 각국의 올해 물가상승률을 한국 10.5%, 태국 11.6%, 인도네시아 44.3%로 전망했다.

실업과 물가상승은 아시아 사회의 새로운 주역으로 기대됐던 중산층의 급격한 몰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도성장에 힘입어 지난 20여년간 아시아 각국에서는 중산층이 확대되면서 총체적 발전을 추구해 왔으나 이제 중산층의 기반이 뿌리째 뽑혀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중산층 비율이 96년 18%였으나 지난해말 14%로 감소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월 4천링깃 이상의 소득자가 7.4%에서 6.2%로 줄었다.

이에 따라 사회계층의 양극화와 정치.사회적 불안이 한층 심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아시아의 선진국이라고 할 만한 일본.홍콩마저 경기불황.생활고로 인한 자살자가 늘어나고 있다.

홍콩의 경우 경기불황에 따른 자살자가 하루 6명으로 전년보다 세 배로 늘었다.

지난 5월 수하르토 정권의 붕괴는 경제위기에 따른 살인적 인플레가 직접적 도화선이 됐다.

또 지난해 11월 차왈릿 용차이윳 태국총리의 실각이나 한국의 사상 첫 정권교체도 모두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경제위기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윤석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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