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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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부두에선 어선들이 출항을 시작하는 새벽 4시경이었는데, 철규와 변씨는 그때 벌써 진부로 떠날 채비를 끝내고 태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숙취 때문에 속이 느글거리는 가운데도 태호는 그러나 군소리 없이 운전석을 차지하고 앉았다.가게에 들렀더니 승희가 따라나서겠다고 했지만, 변씨가 염치없는 계집이라고 꾸짖어서 주질러앉혔다.

진부장터에 도착해서 얼추 좌판을 편 것이 오전 9시경이었으니 다른 장꾼들에 비하면, 한 시간 정도나 늦게 당도한 셈이었다.

평소 그들이 좌판을 벌였던 칼국수집 앞의 공터자리는 일찍 당도한 낯선 어물장수가 차일막을 치고난 뒤였다.

변씨와 태호가 다른 좌판자리를 수소문하고 있는 동안 철규는 장터 초입에 있는 채소전을 기웃거렸다.

자연산 영지나 신선초는 낯설지 않았지만, 초봄께는 발견할 수 없었던 푸성귀 한 가지가 채소전 한편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얼른 보면 당귀 비슷하게 생긴 그 산나물을 진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산물로 이곳 사람들은 유리대라고 부르고 있었다.

오대산이나 소백산 기슭에서 채집해 온다는 유리대는 잎에서 빈대 냄새 같은 역한 비린내가 풍기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식탁에 올려놓기조차 주저되는 산나물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초장부터 천세가 나게 팔리고 있었다.

한 번 맛을 들여놓기만 하면 마치 아편과 같아서, 모내기철 같은 농번기에는 반드시 다시 찾게 된다는 푸성귀였다.

특히 소화의 효능이 탁월하기 때문에 식사 뒤에도 휴식시간이 없는 농사꾼들이 선호하는 푸성귀로 소문나 있었다.

이거요. 연구 잘해서 환약으로 만들어 팔면 옛날에 있었던 조명래고약처럼 금방 명성을 얻을거라요. 상인은 철규에게 엄지를 꼬나들어 보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장소를 물색하던 변씨와 태호는 장터의 북쪽 입구에 좌판을 펴기로 하였다.

그곳은 장터의 남쪽 초입길에 있는 어물전과는 반대편에 위치한 신발전이 모여 있는 한산한 길 모퉁이였으나 그들이 처음 진부장을 찾았을 때, 좌판을 편 장소이기도 했다.

한씨네 행중과 안면이 익숙한 장꾼 서넛이 다가와 수인사를 건넸다.

변씨는 그들과 같이 노상다방이라 할 수 있는 길 맞은편의 커피자판기를 찾았다.

오랜만에 진부장을 찾은 벌충을 한답시고 뒤따라온 그들에게 모두 커피 한 잔씩을 뽑아 안겼다.

건네준 커피잔을 받아든 신발장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생소한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저번 장날 파장 무렵인가…. 말쑥하게 차려 입은 젊은 여자가 나타나서 형씨네들 행방을 심각하게 묻습디다.

한씨네 행중이란 사람들이 요사이는 진부장에 나오지 않느냐고 진땀나게 꼬치꼬치 따져 물었지만 내가 뭘 알아야 대꾸를 하지요. " "에프킬라 시대라지만, 요새 여자들치고 말쑥하게 차려 입지 않은 여자도 있습디까?" "시골여자처럼 보이지는 않더란 말입니다.

나이는 사십대로 보이는데, 살색이 해끔하고 서울말씨를 씁디다.

" "우리 일행중에 누구라고 이름은 묻지 않고 한씨네 행중이라고만 합디까?" "그랬지요. 아마. " "옛날 애인이 여기까지 빚 받으러 찾아왔었나?" "누구 애인 말이오?" "내 애인이지 누구 애인이겠수. " "내일 모레면, 영감소리 들을 것 같은데 설마하니 그럴라구요. " 말은 농담처럼 슬쩍 눙쳐놓았지만, 속으로는 얼른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지난 겨울과 초봄께 철규에게 관심을 보였던 그 서울여자가 틀림없었다.

당장은 태호의 뒤를 밟고 있는 앵벌이 패거리들은 아니라는 것에 놀란 가슴이 진정되었으나, 바람 잘 날이 없는 행중에 이건 또 무슨 풍파인가 싶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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