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엔 추락 “네탓이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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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각국 외환시장에서 엔화 시세가 계속 내리막길을 달릴수록 경제불안에 대한 일본 책임론이 더욱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일본 위기의 본질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결단을 내리지 않는 모호하고도 묘한 정치.경제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금융구조 개혁은 너무 속도가 느리다.

불량채권이라는 큰 지뢰밭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정치인도, 경제관료도, 중앙은행 당국자도 '검토중' 으로 시간을 보낸다.

일본을 이끌어온 대장성과 금융기관을 지도해온 일본은행은 과다한 접대사건 등에 얽혀 범죄집단시되고 행정기능도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만약 국제표준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의 잣대로 잰다면 일본의 대규모 은행들은 줄줄이 도태될 운명이다.

어지간한 은행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일본 주요 언론의 경제부 기자들이 자신의 계좌를 외국계 은행으로 옮기고 있는 실태가 오늘날 일본 시중은행의 현 주소다.

지난해 야마이치 (山一) 증권이 무너졌듯 비슷한 규모의 은행이 또 도산한다면 그것은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자민당 정권의 끝장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부담이 정치권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30조엔의 공적자금 투입이 금융권을 '재생' 시키기에는 역시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이다.

엔화 시세가 계속 떨어지는 것은 이런 약점에 연유한다.

엔화 약세가 가속될수록 은행들이 자기자본비율을 높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융자회수에 나서게 돼 중소기업 도산사태로 번진다.

일본 정부가 경기대책으로 16조엔을 푼다지만 공공사업 부문은 7조7천억엔, 이중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규모는 절반에 지나지 않다.

재정사업을 벌이면 경기가 살아난다는 케인스의 경제정책은 일본에 맞지 않는다.

경제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 국내총생산 (GDP) 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개인소비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장래에 대한 불안을 제거해주지 않는 데 원인이 있다.

정책의 불황이며 시장 불황이다. 이것이 일본의 두번째 약점이다.

일본 정치엔 긴장감이 없다. 일본 민주주의는 너무 무섭다 (자민당 간사장 대리 노나카 히로무의 말) . 국회의원들은 일본의 장래보다 선거구의 지역사업에 매달려 표밭 다지기에만 전념한다. 정치 기능의 마비다.

세번째 약점이다. 일본의 대외 자산이 아무리 많고 무역흑자액.외환보유액이 크다 하더라도 외국 투자가들은 일본의 약점 때문에 엔화를 던진다.

일본은 간헐적인 시장개입으로 하락을 받치려 애쓰고 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다음달로 예정된 하시모토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구조개혁을 촉구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세계경제 불안에 대해 여전히 '일본 책임론' 을 내세우고 있으며 유럽국가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미.일 양국의 공동책임을 주장하면서 위안화 절하를 위한 명분을 쌓는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통화정책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마찰은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국가전략에 엄청난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도쿄=최철주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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