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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대통령 전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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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변변한 대통령 전용기 한 대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이명박 대통령의 말이 아니다. 전용기 구매 예산을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은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지난해 발언이다. 그는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브라질이나 베네수엘라 등 이웃 나라로부터 항공기를 빌려 탄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재임기간 중에 별도의 전용기는 그만두고라도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 한번 하고 싶은 게 소망이오.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고,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 아니겠소.”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진그룹 설립자 조중훈을 청와대로 불러 한 말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조중훈 회장은 자서전에서 이 면담이 대한항공 설립의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그때까지 박 대통령은 미국 항공사인 노스웨스트의 전세기를 주로 이용했다. 미국뿐 아니라 필리핀·호주·뉴질랜드 등의 제3국을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64년 서독 방문길엔 서독 정부에서 보내준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자가용이 없어 렌터카를, 그것도 남의 나라 자동차를 빌려 타거나 얻어 타고 간 격이다. 당시 국내엔 대통령이 외유 길에 타고 갈 만한 변변한 항공기가 없었다. 한국 국적기의 미국 취항은 69년 제트기 1대, 프로펠러기 7대가 고작이던 적자 국영기업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출범한 대한항공이 제 궤도에 오른 70년대에 들어서야 실현됐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안팎(68년)의 빈국에서 2만 달러 소득의 세계 12위 경제 강국으로 거듭났지만 대통령이 ‘렌터플레인’을 타고 다니는 건 변함이 없다. 85년 전두환 대통령 때 마련한 전용기가 있긴 하지만 노후한 것은 둘째 문제요, 애초부터 제구실을 못하는 반쪽 신세다. 한 번 급유로 날아갈 수 있는 항속거리가 짧아 일본이나 중국을 갈 때만 쓰고 미주나 유럽 순방길에는 민간항공사의 항공기를 빌려 타야 하기 때문이다. 민항기를 임대할 때마다 하루 1억원씩 깨지는 돈으로 차라리 전용기를 사는 게 이득이란 여당의 계산은 “불황 극복에 청와대부터 솔선수범하라”는 야당의 반론에 부딪혀 좌절되는 현상이 몇 년째 반복되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 여야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입장을 맞바꾼다. 그러니 이 나라 대통령은 전용기와는 인연이 멀어 보인다. 그나마 언제든 빌려 탈 수 있는 우리 항공기가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아야 할까.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