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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자전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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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974년 양즈파(楊志發)라는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은 85년까지 발굴이 계속됐다. 하지만 흙 속에 묻혀 있던 채색된 병마용들이 햇빛과 공기에 노출되면서 산화작용을 일으켜 색이 바래자 중국 당국은 색상 유지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 발굴을 전면 중단키로 했다. 이처럼 중단됐던 병마용 발굴 작업이 최근 재개됐다는 소식을 접한 뒤 딸아이를 데리고 곧장 중국 시안(西安)으로 날아갔다. 초등학교 1학년인 딸에게 병마용을 보여 주고 싶었다.

#진시황의 병마용은 모두 다르다. 얼굴 모양, 갑옷 형태, 들고 있는 무기 등이 그렇다. 병마용의 가장 큰 가치는 바로 그 ‘차이’에서 나온다. 모두 찍어 낸 듯 같았다면 그 위용이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결코 경이롭지는 못했으리라. 사실 세계 8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진시황의 병마용은 그 무엇보다도 ‘불안’의 창안물이다. 자신의 사후세계를 어떻게 하면 지켜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의 강박관념이야말로 병마용을 만든 동력이었다. 하지만 그 병마용은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다. 그 자체가 불안의 무덤이었다.

#장안으로 더 잘 알려진 시안은 중국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여러 왕조 가운데 자그마치 13개의 왕조가 수도를 삼았던 곳이다. 특히 중국이 가장 강성했던 한당성세(漢唐盛世) 시절의 수도가 바로 장안, 지금의 시안이다. 그 시안의 한복판에 명 태조 주원장이 다시 쌓은 장안성이 자리 잡고 있다. 영화 이티(E.T.)를 보면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 장안성곽 위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높이가 12m나 되는 성곽 위에 폭 12~14m의 벽돌로 포장된 길이 직사각형 형태로 총 13.7㎞나 깔려 있다. 그 위를 자전거를 타고 질주해 보라. 정말이지 하늘을 나는 느낌이 안 들겠는가.

#키가 내 허리에 겨우 닿는 어린 딸을 2인용 자전거의 뒷자리에 앉혔다. 물론 딸아이의 발은 페달에 닿지 않았다. 결국 나 혼자 페달을 밟아야 했다. 처음에는 페달 밟는 발이 묵직했다. 그만큼 힘이 들었다. 게다가 바닥은 아스팔트처럼 매끄러운 것이 아니라 벽돌을 깔아 놓은 탓에 울퉁불퉁해 균형 잡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딸아이를 태운 자전거는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장안성곽 위를 지그재그로 신나게 질주했다. 정말이지 하늘을 나는 것만 같았다.

#혼자 생각했다. “만약 딸이 좀 더 크고 내가 좀 더 나이 들면 그래도 이렇게 달릴 수 있을까?” 아니다. 오직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거다. 나중은 없다. “나중에 하지 뭐” 하는 그 순간, 그 나중은 실종되고 미래는 사라진다. 그래서 지금이 바로 할 때다.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時現今 更無時節)’이라 하지 않던가. “지금이 할 때이고, 그때는 다시 없는 법!” 어린 딸을 뒤에 태우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순간 든 생각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이렇게 달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38도가 넘는 날씨 탓에 땀은 비 오듯 했지만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며 맞는 바람은 시원하고 상쾌했다. 그리고 그 바람결에 실린 딸아이의 환호가 커질수록 내가 밟는 페달은 힘이 더해졌다. 자전거를 타면서 아버지와 딸은 하나가 됐다. 그야말로 내 생애 최고의 시간이었다. 정말이지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굳이 애써 움켜쥐려고 안달하지 마라. 내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의 총량은 오늘 내가 호흡하는 그 바람과 환호만큼일 뿐! 삶은 어차피 바람 같은 것. 바람 부는 이 순간을 더 많이 사랑하자. 하늘을 나는 자전거는 날개가 따로 없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태우고 아낌없이 미련 없이 페달을 밟으면 저절로 날게 될 뿐….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