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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에 …‘입법 구걸’까지 해야 하는 경제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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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국회의원이 되면 맨 먼저 하는 게 선서다. 본회의장에서 하는 그 선서에는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국가 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법 24조)라는 대목이 반드시 들어간다. 쉽게 말해 국회의원은 정당의 이익이나 특정 정파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을 우선 생각해야 하는 직업이다. 직장을 떠나 국회 밖으로 도는 야당, 170석이나 줬는데도 무기력한 여당을 보는 국민의 가슴은 바짝바짝 타 들어간다.

입법부 찾아간 경제5단체 “비정규직법 정말 급합니다”

“2년 계약 만료가 다 된 중소기업들이 갈팡질팡이다. 기업들이 미래를 예측해 인력을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이동응 경총 전무)

비정규직 고용기간을 2년으로 제한한 비정규직법의 확대 시행 시점이 다음 달 1일로 다가오면서 기업 현장에선 이미 비정규직 대량해고 조짐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논의해야 할 국회가 문도 못 열고 있자 보다 못한 재계가 18일 직접 국회를 찾아갔다. 전국경제인연합회·대한상공회의소·한국경영자총협회·한국무역협회·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5단체 부회장단은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 김성조 정책위의장 등을 만나 신속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김상열 대한상의 부회장은 “지금 같은 불황기에 중소기업에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며 “비정규직 사용기간 제한 자체를 폐지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만 어쩔 수 없다면 적어도 사용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는 차선책이라도 강구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부회장은 “한나라당은 최근 비정규직법 확대 시행 시기를 유예하는 쪽으로 당론을 정했는데 이는 문제를 뒤로 미룬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송재희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은 “비정규직 1명을 정규직화하면 월 30만원이 더 들기 때문에 중소기업 입장에선 해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빨리 국회가 방침을 정해 줘야 기업이 새로 사람을 채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이동응 경총 전무는 “사실 기업이야 해고한 뒤 대체 인력을 쓰면 되지만 해당 비정규직 근로자 입장에선 얼마나 걱정이 크겠나. 지금 해고되면 다른 직장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비정규직법 개정은 기업보다 근로자를 돕는 것이란 점을 인식해 달라”고 강조했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노동계는 재계 의견과 반대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는 요구를 하는 실정”이라며 “일단 대량해고를 막기 위해 시행 시기를 유예하자는 한나라당의 당론은 고육지책임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안 원내대표는 “현재 그런 방안마저도 야당이 국회에 들어오질 않아 논의도 못하고 있다”며 화살을 민주당 쪽으로 떠넘겼다.

부회장단은 19일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를 면담할 계획이다. 안 원내대표는 “민주당에 가면 원내대표단뿐 아니라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상정할 생각이 없는 추미애 환경노동위원장도 꼭 만나 보라”고 권했다.

김정하 기자



국회 밖으로만 도는 민주당
국회 열자고만 하는 한나라

민주당은 18일에도 국회의사당 밖으로 돌며 ‘MB악법 철폐’를 주장했다.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에선 민주당의 MB악법 주장에 대한 반박이 나왔다.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는 이날 오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의원 30여 명과 함께 ‘국민 여론 수렴 거부하는 한나라당 규탄 및 언론악법 저지 결의대회’에 참석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언론 관련 악법을 강행 처리한다면 우리는 결사항전할 것”이라고 소리쳤다. 우윤근 원내수석부대표와 우제창 원내대변인은 의원 5명과 한국노총 성남본부를 찾아 분야별 비정규직 노조 대표들과 만났고 문학진·장세환 등 강경파 의원 모임인 ‘국민모임’은 용산참사 현장에서 열린 시국 미사에 참석했다. 최재성·강기정 등 당 주류 의원 10명은 ‘다시 민주주의’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당 한쪽에선 국회 공전으로 인한 부담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늘고 있다. 한 4선 의원은 “국회의원은 싸워도 국회에서 싸우고 죽어도 국회에서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목소리에 우 수석부대표는 “국회를 열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한나라당의 반응이 없어 협상이 겉돌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최고위원회의 석상에서 민주당이 ‘MB악법’ ‘재벌옹호법’ ‘서민기만법’이라며 이름 붙인 법안 중 여야가 합의로 처리한 9개 법률을 예로 들며 조목조목 비판했다. 민주당 정책위원회가 지난 2월 18일 발간한 ‘MB악법 분석자료집’을 인용해서다. 자료집에서 언론장악·재벌방송 MB악법이라고 분류된 ‘디지털방송전환 및 활성화 법률’은 3월 3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와 법사위원회를 거쳐 4월 1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하자 상임위와 본회의를 그대로 통과한 것이다. 재벌은행법이라고 이름 붙인 한국산업은행법과 은행법도 각각 4월 29, 30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은행법의 경우 논란이 됐던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소유한도를 원안 10%에서 9%로 낮추는 선에서 여야가 합의해 처리했다. 결국 지분 1%포인트를 두고 ‘재벌은행법’이란 꼬리표가 붙었던 셈이다. 민주당이 재벌은행법의 하나로 반대한 ‘금융지주회사법’은 여야가 처리를 합의해 4월 30일 상임위를 통과했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MB악법이라고 이름 붙인 많은 법안이 상임위에서 토론과 타협을 통해 통과됐다”면서 “민주당 지도부는 이제 MB악법 타령은 그만하고 빨리 국회를 열어 상임위에 모든 것을 맡기자”고 제안했다.

정효식·임장혁 기자



4개월간 9500만원 쓰고 보고서도 못 쓴 미디어위

9502만원. 미디어법안 관련 여론을 수렴하자며 만든 국회 자문기구인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미디어위)가 지난 4개월간 쓴 예산이다. 이 중 8257만원은 위원 20명의 회의참석 수당, 전문가들에게 맡긴 원고료, 공청회에 참석한 진술인 사례비 등 인건비 명목으로 나갔다.

1억원에 가까운 이 국민 세금은 결국 허공으로 날아가게 됐다. 17일 민주당 측 위원들이 “한나라당이 여론조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위원회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활동종료 시한(25일)을 불과 일주일여 남겨놓은 시점에서다. 한나라당 측 위원들도 “모든 법을 여론조사에 따라 만들면 도대체 국회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여론조사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미디어위는 최종보고서를 내놓기도 어려워졌다.

미디어위는 여야가 2월 국회에서 미디어법 처리를 놓고 진통을 겪자 여론 수렴을 위한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드는 데 합의하고 출범시킨 기구다. 하지만 출발부터 삐걱댔다.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간사들은 미디어위 활동기간 100일 동안 상임위를 열지 말지를 놓고 다퉜다. 합의사항을 발표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상임위 개최에 관해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의견이 다르다”며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위원회에서는 ‘여야 대리전’이 벌어졌다. 위원회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회의원의 참여는 배제했지만 20명의 위원들을 여야동수로 추천한 게 문제였다. 위원들은 자신을 추천한 정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사소한 시비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결국 미디어 법안은 돌고 돌아 국회로 다시 넘어왔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18일 “국회의원들이 논의해야 할 미디어법안을 미디어위에 맡겼을 때부터 예견된 결과”라며 “공당이 국민과 한 약속인 만큼 6월 국회에서 미디어법안은 반드시 표결 처리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날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는 “한나라당에 의해 미디어위가 무력화됐다”며 “3월 2일 미디어법안과 관련한 여야 간의 합의는 전면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자유선진당은 4월 소유규제는 완화하되 사후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자체 미디어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민주당을 향해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않고 무조건 반대만 외치는 것은 떼쓰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선승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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