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침묵의 나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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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노엘레노이만(Noelle-Neumann)이라는 언론학자가 있다. 언론 보도가 여론의 추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가 그의 관심사였다.

그는 핵 에너지에 대한 부정적 보도가 증가하자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사람이 그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그는 이런 현상에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였다.

이 이론의 기본 가정은 간단하다. 사회는 일탈자에게 고립의 위험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은 그런 고립의 두려움을 지속적으로 경험한다. 사람들은 고립되지 않기 위해 사회의 여론 동향을 주의 깊게 살핀다. 만약 여론과 자신의 생각이 일치한다고 느끼면 그 사람은 그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기 주장을 편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 사람들은 다수 의견에 맞서기보다 차라리 침묵을 택한다. 소수 의견으로 지각된 의견은 그렇게 하여 나선을 그리면서 공론 형성의 장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이 이론의 요지다. 노엘레노이만은 사람들이 여론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주로 의존하는 것이 대중매체라고 밝혔다.

노엘레노이만이 우리나라에 와서 여론 형성 과정을 관찰한다면 아마 매우 흥미 있는 현상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침묵의 나선은 두 가지 판이한 유형을 보인다. 하나가 우회전 나선이라면 다른 하나는 좌회전 나선이다. 여기에는 대중매체에 대한 특이한 선호 경향이 개입한다.

우회전의 나선은 지난해의 촛불시위나 이번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국면에서 나타났다.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주로 인터넷 매체에 의존한다.

그들은 거기에 오른 다수 의견이 자기 의견과 같으면 능동적인 동조자가 된다. 집회에 가담해 대중과 열기를 공유하면 매우 적극적인 참여자로 돌변한다. 반대로, 인터넷 매체에 접근하면서도 다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오른쪽으로 돌며 침묵의 세계로 침잠하고 만다.

좌회전의 나선은 뚜렷한 예를 들기는 어렵지만 오히려 더 일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연령층이나 경제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인터넷 매체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그들은 이른바 메이저 신문을 주로 읽는다. 거기에 실린 정보가 유익한 것이고, 거기서 주장하는 바가 옳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메이저 신문의 시각에 회의적인 사람은 나이 든 사람들, 먹고 사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는 침묵하는 것이 편하다. 이들은 왼편으로 도는 나선을 그리며 침묵의 나라로 떠나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일탈자가 느끼는 고립의 위험은 노엘레노이만이 발견한 것과 크게 다르다. 그 여성학자가 발견한 것은 일탈에 대해 개인이 스스로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일탈자에 대해 공공연한 협박이 뒤따른다. 오른쪽으로 돌며 떠나야 할 상황에서 떠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수구 꼴통 파시스트로 매도당한다. 얼마 전 서울광장 집회에서 어느 노인이 눈치 없이 처신했다가 수모를 당했다. 반대로, 좌회전의 나선을 그리며 침묵해야 할 상황에서 주제넘게 입을 열었다가는 영락없이 친북 좌파 빨갱이로 몰린다.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자의든 타의든 공론 형성 과정에서 침묵하는 사람의 수가 적은 사회가 곧 좋은 사회다. 보복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많은 사람이 자유로이 토론을 전개할 때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해야 토론에 참가한 사람들이 인격적 모욕을 느끼지 않고 품격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사회가 살 맛 나는 사회다.

그럼 좋은 언론이란 어떤 언론인가? 좋은 인터넷 매체라면 우회전하여 공론장을 이탈하는 침묵의 나선을 붙들어야 한다. 바른 메이저 신문이라면 왼편으로 돌며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는 나선을 뒤쫓아야 한다. 나선을 그리며 사라져 가는 의견을 치지도외(置之度外)하면 언젠가 반드시 역풍으로 돌아온다.

좋은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여든 야든 고정적인 지지자만 바라보고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며 다른 편 여론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지고 사회통합이 가능해진다. 자기주장만을 역설하는 정치가 아니라 공존이 가능한 영역을 찾는 정치, 타협이 가능한 지점으로 다가가는 정치를 보고 싶다. 그래야 고립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진다.

김민환 고려대 교수·언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