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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광장의 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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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 성향이 세 가지 불변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이제는 알겠다. 자수성가, 기독교 신앙심, 최고경영자(CEO)가 그것.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하고, 주님은 무한한 은총으로 길 잃은 양떼를 ‘반드시’ 구원하며, 불철주야 뛰는 CEO는 사원들이 ‘반드시’ 존경하고야 만다는 믿음이다. 이 ‘반드시’에의 집착은 그를 대통령으로 등극시키기는 했으나 그의 통치 양식에서 융통성을 제거하고 마음의 행로를 아예 한 방향으로 고정시키는 응고제가 되었다. 이 단호한 ‘위정척사(衛正斥邪)’로 법과 질서가 바로 잡혔다고 환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사(邪)’로 분류된 항목들에 철조망이 쳐지고, ‘마이동풍’, ‘소귀에 경읽기’ 같은 경구가 유행하고, ‘명박산성’ ‘전경버스’ 같은 갑갑한 이미지가 지지자를 등 돌리게 하는 것도 막을 수 없다.

광장을 둘러싼 시비만 해도 그렇다. 원래 광장에 부여된 최고의 기능은 정치적인 것이다. 멋진 연설로 군중을 선동하려는 독재자에겐 광장이 필요했고, 민의를 증폭시키려는 민주시민들은 광장으로 몰려 나왔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도성민들이 모여드는 세 개의 광장이 있었다. 철물교(鐵物橋)로 불린 종로 탑골공원 부근, 혜정교(惠政橋)로 불린 광화문 교보문고 앞, 그리고 덕수궁 대한문 앞(현 서울광장)이 그것이다. 상소나 차자를 올릴 자격이 없던 평민들에겐 왕의 행차를 접할 수 있는 이 장소가 유일한 언로였다. 왕은 이곳을 지나면서 평민들의 상언·격쟁을 접수하곤 했다.

문제가 된 서울광장은 1898년 태생 당시부터 정치 기능을 발휘했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를 친일단체 황국협회가 공격한 곳은 덕수궁 남문이었고, 고종에게 민의를 전달하러 군중들이 자주 운집한 곳은 대한문 앞이었다. 오늘날의 서울광장인 것이다. 고종은 광장에서 사나운 짓을 저지른 군중들을 꾸짖으면서 자책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내가 나라를 다스린 이래로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점차 소동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오직 여러 만백성의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오늘 크게 깨닫고 나는 매우 부끄러워한다.” 몇 년 뒤 고종이 승하하자 도성민들이 운집했던 곳, 3·1운동의 만세 행렬과 광복의 기쁨을 못이긴 군중들이 무의식적으로 향하던 곳이 서울광장이었다. 박정희는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육사생도들의 행진을 시청 앞에서 사열했다. 말하자면, 한국 정치의 눈물겨운 사연들이 아로새겨진 서울광장은 미래 세대가 펼칠 또 다른 정치적 장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곳을 봉쇄한다고 광장의 역사적 기억이, 시민들의 무의식이 바뀔 리 없다. 서울광장이 꾼들의 정치놀이터, 시위대의 선동 장소로 쓰인다고 할지라도 원천적 차단은 무용할뿐더러 몰역사적 행위로 기록될 것이다. 그것이 선동·선전이고 혼란만을 조장한다고 판단되면 시민들이 먼저 외면할 것이다. 서울광장의 사용을 ‘건전한 여가활동과 문화행사’에 국한한다는 조례는 결국 지켜지지 않을 것이고, 새로 개장될 광화문광장도 옛 혜정교의 상언(上言) 기억을 되살려낼 것이다. 그곳엔 동학교도들이 사면을 청원하는 신원상소(伸寃上疏)의 곡소리가 묻혀 있다.

진보는 역사를 만들고, 보수는 역사를 지킨다. 광장은 진보와 보수가 만나 서로 다른 역사를 주장하고 접점을 찾는 공간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오늘날의 저 투박한 충돌은 접점을 찾는 진통이다. ‘위정척사’로 무장한 통치자에겐 그런 광장이 거추장스럽다. 혼란하고 불온하고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그곳이 직업시위대의 마당이 될까 두려워하고, 6·10 항쟁 기념식에 모인 군중의 숫자를 세고 있다면, 사회통합이나 화합 같은 거창한 말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광장을 폐쇄하면, 3년 반 뒤엔 보수를 자처하는 어떤 집단들도 그곳엔 발을 못 붙일 것이고, 또 뒤바뀔 ‘사(邪)’의 감옥에 영영 가둬질 것이다. 밀운불우가 아니라, 과운(寡雲)이라도 필요하다면 작우(作雨)하는 게 정치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