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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덕의 13억 경제학] 중국증시(53) ‘라오빠구(老八股)’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90년 12월 19일 상하이증시 설립시기에 거래됐던 8개의 종목은 흔히 라오빠구(老八股)로 불립니다. 중국에 주식시장의 역사를 연 주역이지요. 오늘 한 라오빠구를 통해 A주 시장의 발전을 엿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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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월 14일 새벽 3시. 상하이의 겨울밤은 차가웠다. 상하이에 살아 본 분은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를 아실게다. 그 추위 속에서 자전거 패달을 밟는 한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그가 간 곳은 시내 난징(南京)로 근처 불교사당인 징안스(靜安寺)주변에 있는 공상은행신탁투자공사 분점. 그는 목적지에 도착하고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담배가 아직 다 타들어가지 전,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를 확인했다.

“혹시 주식을 사러 오셨나요?”
“예, 맞습니다. 제 뒤에 서십시오”

줄은 금방 길어졌다. 푸둥(浦東)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는 이미 끝이 보이지 않는 장사진이 연출됐다. 경찰이 뒤늦게 나와 질서를 잡느라 허둥댔다. 중국 최초의 주식공개매각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새벽 찬바람을 가르며 자전거 패달을 밟았던 사람의 이름은 씨에하이칭(謝海淸). 상하이계량국(計量局)에 다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는 저축해 모은 돈 2600위안을 꼬깃꼬깃 주머니에 찔러놓고 현장에 달려왔다. 그가 사려는 주식은 옌중(延中)실업이라는 회사였다. 이 회사는 액면가 50위안에 10만주를 팔았다. 500만 위안을 공모했던 셈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첫 주식 발행이었다.

이날 씨에 선생은 모두 51주를 샀다. 덕택에 그는 ‘최초의 공모주 주주’라는 이름으로 중국 증시 역사에 남게 된다.

“당시 50위안이면 평범한 직장인의 월급이었습니다. 개혁개방 초기였던 당시 일반인에게 ‘주식’이라는 말은 매우 생소했었지요. 그럼에도 나는 전 재산을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감히 천하의 선행하는 자가 대부분 승리한다(敢爲天下先者,大都是贏家)’라는 아버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지요.”

씨에 선생은 CCTV에 출현해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랬다. 당시 주식은 생소한 단어였다. 그러나 많은 중국인들이 주식 매입에 달려들었다. 주식이 공개되면 여지없이 인파가 몰려들었고, 때로는 시위로 번지기도 했다. 1992년 8월 10일 선전에서 벌어진 ‘8·10’사건은 대표적이다.

그렇게 중국에서 주식은 시작됐다.

씨에 선생이 샀던 옌중실업 주식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당시 옌중실업은 말이 주식회사지 실제로는 기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조직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농촌으로 쫓겨 갔다 상하이로 돌아온 청년 몇 명이 모여 만든 평범한 꺼티후(個體戶·소형 자영상점)에 불과했다. 복사기 몇 대 놓고 복사를 해주는 게 일의 전부였다. 그런 그들에게 500만 위안의 거금이 하루아침에 들어온 것이다.

2월 17일 주주총회를 열었다. 옌중실업의 모체였던 옌중복사기공업(延中復印工業)의 직원이었던 친궈량(秦國梁)이 사장을 맡았다. 주식이 모두 일반에 고루 분배됐기에 누구도 회사를 지배할 수 없었다. 주총에서 사장으로 뽑힌 친궈량은 500만 위안을 갖고 우선 본사 건물을 신축키로 했다. 그렇게 300위안을 썼다. 그 후 돈 되는 것은 모두 손을 댔다. 후지쓰의 칼러 인쇄기를 들여와 인쇄사업을 확대했고, 상하이에 첫 햄버거 가게를 만들어 식음료사업에 진출하기도 했다. 홍콩업체와 제휴해 낚시대를 제조했고, 심지어 라이터를 만들기도 했다.

동분서주, ‘기업 만들기’에 나섰던 옌중실업에 또 한 번의 기회가 온다. 상하이에 증시가 설립된 것이다. ‘주식은 있으되 시장이 없는(有股無市)’시대가 끝이 난 것이다.

1990년 12월 19일 상하이증권거래소가 설립된다. 개장일 8개의 주식이 상장됐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옌중실업이었다. 옌중실업이 라오빠구(老八股·상하이증시 개장일에 거래됐던 종목)의 하나였던 셈이다. 첫날 거래에서 185.3위안. 액면가의 3.7배였다. 옌중실업은 포장재료, 음식료, 인쇄 등을 주업종으로 가진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좋은 출발이었다. 91, 92년 두 차례에 걸쳐 액면분할을 했고 유·무상 증자도 했다. 옌중실업 주주들은 적잖이 재미도 봤다.
그러던 1993년 9월 시장에서 루머가 돌기 시작한다. 누군가 옌중실업 주식을 장외시장에서 사들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사장 친궈량은 개의치 않았다. 돈 많이 벌어서 주주들에게 이익을 돌려주고 있는데 무슨 문제가 발생하느냐는 식이었다. 그의 판단은 순진한 것으로 금방 들어났다. 9월 30일. 시세판에 옌중실업 주식 거래가 정지된다는 신호가 올라왔다. 이와 함께 선전증시의 한 상장업체인 선바오안(深保安)이라는 회사가 옌중실업의 주식 5%를 인수했다는 공고를 냈다.

친궈량은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5%면 경영권을 압박할 만한 충분한 액수였기 때문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선전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던 선바오안은 자회사를 통해 이미 장외에서 19.8%의 옌중실업 주식을 확보한 상태였다. 적대적 인수합병(M&A)였던 셈이다. 당시 언론은 상하이 시민들이 만든 ‘라오빠구’회사를 선전의 부동산업체에게 빼앗겼다며 흥분하기도 했다.

친궈량은 법원에 제소하고, 언론에 호소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시장은 냉혹했다. 그는 새로운 이사장을 모셔야 했다. 자기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대주주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했다. 선바오안은 옌중실업 경영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숨겼을 뿐이다. 5년 후 선바오안이 '말각'을 드러낸다.

1998년 5월, 옌중실업을 둘러싸고 또 다른 ‘M&A 사건’이 발생한다. 이번에는 베이징대학교의 학교기업(중국에서는 이를 ‘校辦企業’이라 함)인 ‘베이다팡정(北大方正)이 주인공이었다. 베이다팡정은 5월 8일 옌중실업의 주식 5%를 매입했다고 공시했다. 엔중실업의 주식을 사들일 것이라는 뜻도 분명히 했다. 시장의 관심은 옌중실업의 대주주인 선바오안에 쏠렸다.
그러나 선바오안은 아무런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팡정의 매입을 환영한다’고 했다. 당시 열렸던 임시주총은 ‘새로운 주주 환영대회(迎新大會)’가 됐을 정도다.

선보안이 옌중실업의 주식을 사들일 때 회사 주가는 약 10위안에 형성됐다. 5년이 난후에는 30위안으로 뛰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톡톡히 챙겼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를 들어 언론에서는 ‘라오(老)상공업 도시인 상하이가 개혁개방의 선도도시인 선전에게 당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998년 10월 라오빠구였던 ‘옌중실업’이라는 종목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대신 ‘팡정커지(方正科技)’가 같은 종목번호(600601)를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기에 팡정커지는 스스로를 ‘라오빠구’라고 자랑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PC업체인 팡정커지는 상장과 함께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PC보급 붐과 함께 팡정커지는 2002년 우량종목으로 구성되는 ‘상하이180지수’에 편입되는 등 급성장했다. 2004년에는 ‘상하이50지수’에 오르기도 했다. 모그룹 베이다팡정은 상하이증시의 팡정커지를 비롯해 선전 홍콩 말레이시아 등에 모두 5개의 상장사를 거느리고 있다. 2008년 매출액은 420억 위안(약 8조 원). ‘라오빠구’였던 예중실업은 21세기 정보통신 시대를 팡정커지라는 이름으로 그 빛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씨에하이칭 얘기로 돌아가보자.

씨에 선생은 1985년 1월 14일 50위안 짜리 옌중실업 주식 51주, 2550위안을 투자했다. 그가 그 주식을 모두 갖고 있다면 얼마를 벌었을까?

옌중실업은 선바오안, 팡정커지를 거치는 동안 모두 5차례 유·무상 증자를 단행했다. 유상증자에 필요한 돈은 주당 1만845위안. 이와 함께 2차례 액면을 분할해 액면가는 50위안에서 1위안으로 조정됐다. 이 과정을 통해 1985년 당시 1주는 9704주로 불어났다.

2009년 6월 말 현재 주가는 4.15위안. 씨에 선생의 총 시장가를 계산해 보면 (50×9704×4.15)-(50×10845)=147만1330 위안에 달한다. 1985년 2550 위안이었던 것이 24년 만에 147만1330위안으로 부푼 것이다. 약 577배로 늘어난 셈이다.

이는 그가 주식을 팔지 않았을 때 얘기다. 물론 그가 그 주식을 아직 갖고 있을 리 없다. 그러나 한 라오빠구가 24년 만에 577배 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국경제의 성장을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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