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동물원의 효시는 오스트리아 왕이 왕비에게 준 ‘선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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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22면

기원전 1100년 중국 산시(陝西)성의 한 궁궐. 기와 지붕이 얹어진 목조 건물 안쪽, 목책과 청동으로 만든 창살 우리 안에 왕뱀과 거북ㆍ사슴 등이 살았다. 높은 담이 쳐진 야외 우리에는 호랑이와 코뿔소 같은 대형 동물도 있었다. 왕과 귀족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구경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동물학계가 세계 동물원(動物園)의 효시로 보고 있는 중국 주(周)나라 무왕(武王) 당시의 ‘동물원’ 풍경을 상상해 본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당시 수도 호경(鎬京·지금의 시안 인근)의 궁궐 안에 호랑이와 사슴ㆍ코뿔소 등 대형 동물은 물론 왕뱀ㆍ거북ㆍ물고기ㆍ새 등을 사육했다. 『사기』에는 이를 ‘지식원(知識園)’이라 불렀다고 돼 있다.

동물원 이야기 고대에서 현대까지

오창영(82) 전 서울대공원 동물부장은 “지금부터 3000년 전에 이미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에 있던 코뿔소나 왕뱀을 중국 본토로 옮겨 키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지식원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동물학상의 교육과 연구시설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어 동물원의 효시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야생동물을 모아 기른다’는 의미에서의 동물원은 예부터 있었다. 고대 이집트 왕조(기원전 3000년)나 그리스·메소포타미아·아시리아·바빌로니아 등에서 야생동물의 수집과 사육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사(History of Animals)』라는 책 속에서 500종의 동물을 분류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에 동물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의 동물원과 다른 점이라면 왕이나 귀족 등 소수 상위 계층만의 오락이나 취미를 위한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서양에서 ‘미내저리(menaserie)’라 불린 귀족 전용 동물원은 중세 이후까지 이어졌다.

‘현존 最古’ 쇤브룬 동물원
지금처럼 누구라도 찾아갈 수 있는 형태를 갖춘 명실상부한 동물원은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동물원이 처음이다. 근대 동물원의 효시로 불리는 이 동물원은 지금도 빈 쇤브룬 궁전의 정원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동물원이다. 쇤브룬 동물원은 원래 1752년 오스트리아 국왕 프란츠 1세가 자신의 왕비를 위해 세운 것이다. 방사형으로 만든 동물원 한가운데 당시 왕비 마리아 테레사를 위한 별관을 만들어 식사를 하면서 코끼리와 낙타ㆍ얼룩말을 보고 즐기게 했다. 쇤브룬 동물원은 13년 뒤인 1765년 아들인 요제프 2세가 시민의 희망을 받아들여 일반에 공개하면서 명실상부한 동물원으로 탈바꿈했다.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런던동물원
영국 런던 리젠트 공원 안에 있는 런던동물원도 세계 동물원사(史)의 획을 그은 곳이다. 이전의 동물원은 모두 왕가에서 만들고 왕과 귀족을 위해 운영됐다면, 1829년 세워진 런던동물원은 운영 주체와 목적이 완전히 바뀌었다. 시민의 뜻을 모아 설립하고, 영국 동물학협회가 운영한 이 동물원이 내건 운영 목적은 ‘동물학과 동물생리학을 발전시키고 동물계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의 소개’였다.

설립자는 당시 영국의 탐험가 겸 박물학자였던 토머스 래플스 경이었다. 그는 런던동물학협회 초대 회장이었으며, ‘동물 복지 제일주의’를 외쳤던 동물애호가였다. 19세기 전반 동안 런던동물원을 본보기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 도시에 새 동물원이 꼬리를 물고 건설됐다. 동물원을 뜻하는 영어 단어 ‘zoo’가 바로 런던동물원에서 유래했다. 당시 이 동물원의 이름은 ‘The Zoological Garden of London’이었는데, 런던 시민들이 줄여 ‘Zoological garden’ 또는 ‘Zoo’라고 부르면서 지금의 동물원이란 뜻으로 굳어졌다.

1908년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독일 하겐베크 동물원으로 온 고릴라와 흑인 아이들. 두 아이는 고릴라의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 아프리카에서부터 동행했다.하겐베크 회고록

19세기 유럽에선 ‘사람 쇼’ 유행
인류의 역사가 항상 진보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동물원의 역사도 시대를 거스른 사례가 있다. 1874년 독일 함부르크 외곽에 세워진 하겐베크동물원이 그런 곳이다. 이 동물원은 동물뿐 아니라 사람을 전시해 돈을 번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 동물원의 설립자인 카를 하겐베크는 원래 유럽 지역 최대의 동물 거래상이었다. 동물 거래로 돈을 벌기 어렵게 되자 ‘사람 쇼’를 생각해 냈다.

핀란드ㆍ노르웨이 북부 라플란드에서 온 라피족 세 남자, 엄마와 딸, 갓난아기, 그리고 순록이 ‘사람 쇼’라는 이름으로 전시됐다. 하겐베크는 자신의 회고록에 “작은 라플란드 엄마가 수많은 관람객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마다 엄청난 반응이 일어났다”고 적었다. 하겐베크동물원이 큰 인기를 얻자 사람 쇼는 19세기 유럽 전역의 동물원으로 퍼져 갔다.

북극지방 에스키모와 남극지방 푸에고인, 호주 원주민, 아프리카 흑인이 사람 쇼의 대상이 됐다. 1880년에는 ‘에스키모 쇼’ 멤버 전부가 사망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당시 유럽 동물원과 인류학회는 사람 쇼를 ‘인류학 연구’라는 미명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당시 베를린의 인류학회장이었던 루돌프 피르호는 1881년 발간된 학회보에서 “그들은 그토록 나쁜 온갖 날씨를 견뎌 내는 놀라운 인내력을 보여 주었다. 캄차달족이라면 몰라도 지상의 어느 종족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할 능력이었다”고 적었다.

세계적 포획 경쟁에 ‘동물 수난시대’
근대 동물원이 곳곳에서 생겨 나던 19세기는 동물들의 수난시대였다. 동물원에 전시될 동물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 등 야생동물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잔혹한 사냥이 만연했다. 사냥꾼들은 어린 코뿔소나 사자 한두 마리를 잡기 위해 어른 코뿔소와 사자 수십 마리를 죽이는 방법을 썼다. 어미를 죽이면, 새끼는 달아나기를 포기하고 순순히 잡힌다는 사실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 큰 야생동물은 잡기가 너무 힘드는 데다 옮기는 도중 죽어 버리는 경우도 흔하고 길들이기도 힘들었다.

포획한 야생동물을 아프리카 등지에서 유럽으로 이송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밀림에서 출발해 육로와 강-바다-육로를 거쳐 독일 함부르크 등 야생동물 거래지역으로 동물들을 데려오기까지 4~5개월 이상 걸렸다. 도중에 죽는 동물이 많게는 전체의 3분의 2가 될 때도 흔했다. 잡고 운송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스트레스, 서식지와 북부 유럽의 기후 차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 동물 거래상 요제프 멩게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프리카 현지 가격이 80~400마르크이던 코끼리 한 마리가 유럽에서는 3000~6000마르크에 팔렸다.

야생동물의 수난사는 야생동물이 멸종 위기에 이르러서야 잦아들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 종의 국제 거래에 관한 협약(CITES)’이 제정됐다. 93년에는 브라질 리우에 158개국 전문가가 모여 생물 다양성 보존협약을 맺었다. 현재 122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해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 3만5000여 종의 국제 거래를 감독하고 있다.

서울동물원 모의원 원장은 “90년대 이후 야생동물의 포획 및 거래가 실질적으로 금지됐다”며 “이후에는 기존 동물원에서 태어나거나 남아도는 동물들만이 세계 각 동물원으로 공급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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