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28. 테헤란 아시안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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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헤란 아시안게임 때 이인표 코치(左)와 테헤란 거리에서.

1974년 이란 테헤란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나는 이때 팔자에도 없던 한국선수단 기수 노릇을 했다. 한국 선수단 기수는 현역 국회의원 역도 선수인 황호동이었다. 그런데 황호동이 체중조절 문제로 현지 도착이 늦어져 내가 대신 맡은 것이었다.

황호동은 나와 고려대 입학 동기였다. 선수시절부터 무척 가깝게 지냈고,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 나란히 출전하면서 더 친해졌다. 그는 반골 성향이 강했다. 선수촌 휴게실에서 TV를 시청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얼굴이 나오면 "밥맛 없게 저건 왜 또 나와!"라고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리곤 며칠씩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수사기관에 불려가 불경죄로 혼찌검을 당하고 돌아오는 눈치였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선수생활을 계속한, 특이한 선수였다. 아시안게임 출전 직전에 청와대로 선수단이 인사를 갔을 때였다. 박 대통령이 황호동을 알고 있었다.

"황의원, 연습은 어떻게 하고 있지요?"

"예, 연습은 뭐, 식당에서 합니다."

"아니, 식당에서 무슨 연습을…."

"말 마십시오. 익사 직전입니다."

그는 무제한급이었기 때문에 체중 늘리기가 관건이었다. 틈만 나면 뭔가를 먹어야 했다.

테헤란 대회 때는 아시안게임 최초로 선수촌이 생겨 각국 선수단이 모두 같이 숙식을 했다. 한국선수단 단장은 73년 ABC대회 단장이던 신동관씨였다. 그는 선수단 전체에게 오전 6시에 선수촌 광장에 집결하도록 했다. 그리고 태릉에서 하듯이 체조를 하고 "이기자!!" 는 고함을 지르도록 시켰다. 그러나 단잠을 자던 다른 나라 선수들의 항의가 잇따르자 이 행사는 첫날을 끝으로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한국 선수단은 아침 저녁으로 회의를 했다. 육영수 여사의 저격사건이 발생한 직후였고, 북한도 이 대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줄곧 긴장상태였다. 중국은 테헤란 대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중국과 준결승을 벌였다. 신동관 단장과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은 나란히 한국팀 벤치 뒤에 앉아 있었다. 다혈질인 김택수 회장은 경기 내내 "아니! 그것도 못 잡아." "야, 그것도 못 넣냐.""에이 바보같이." "태릉에선 도대체 뭘 가르친 거야" 하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후반 10분쯤 "에이, 안 되겠구먼"하더니 김 회장이 자리를 떴다.

그의 잔소리가 없어지자 경기는 술술 풀렸고, 우리는 중국에 119-114로 대 역전승을 거뒀다. 경기가 끝나자 신 단장은 웃으며 나에게 와서 "내가 이길 줄 알았지"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 밤 선수촌에서 한국선수단 회의 도중 김택수 회장이 "도대체 정신무장이 덜 돼 있다. 오늘 한국팀 경기를 봤는데 그렇게 무기력하게 질 수가 없었다" 며 질책했다. 가만히 듣다 보니 농구 이야기였다. 신 단장이 "농구는 이겼는데요.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하고 반문했다. "뭐라고? 이겼다고?" 김 회장은 머쓱해져 황급하게 말꼬리를 돌렸다.

이 대회서 한국은 선전했으나 이스라엘의 장신 벽을 넘지는 못했다. 결승에서 이스라엘에 줄곧 끌려다니다 결국 금메달을 빼앗기고 말았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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