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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한국 사람, 미국 바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미국에서 벤처기업을 일으켜 37세에 억만장자가 된 김종훈 유리시스템스회장은 우리에게 희망이자 절망이다. 그의 핏줄이나 생김새를 보고 우리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그러나 "왜 한국에서는 이런 사람이…" 를 생각하면 참담하다.

위기의 시절을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박찬호 선수의 투타 (投打) 는 모처럼의 보상 (補償) 이지만 金회장의 성공은 뼈아픈 상실 (喪失) 인 줄을 알아야 한다. 김종훈을 낳은 한국이 그의 꿈을 실현할 터가 돼 줬다면 오늘의 위기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로벌리제이션 속에서 경제의 '터' 는 그만큼 중요하다. 대체 한국 바닥과 미국 바닥은 무엇이 어떻게 다르기에 우리는 코리안아메리칸이 이룬 아메리칸 드림을 보며 보상심리나 어루만지게 됐는가.

한창 실리콘밸리 배우기 바람이 불 때 나왔던 아이디어 중 하나는 인천송도에 대규모 미디어밸리단지를 닦겠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벤처 투자자금도 꽤 모였고 인수.합병 (M&A) 의 전문가들도 줄을 섰다 한다.

그러나 어림없는 소리다. 실리콘밸리가 자생 (自生) 하고 외국이민이 억만장자가 되는 미국 바닥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땅.자금.사람이 아니다.

미국 벤처산업의 인프라는 잘 닦은 산업단지가 아니라 뉴욕에 서있는 주식시장 나스닥이고, 기여한 만큼 주식을 나눠 갖는 스톡옵션제도다. 죽자 하고 벤처에 뛰어드는 것은 '돈 독' 들이 올라서고, 그 욕구를 1차적으로 풀어 주는 것은 나스닥에 첫 상장될 때 뛰는 주가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또 다른 코리안아메리칸인 스티브 김도 통신장비 제조업체 자일랜 (Xylan) 을 93년 8월 주당 가치 30센트로 시작해 96년 2월 공개할 때 주당 26달러로 평가받게 했다. 2년반 만의 8천7백% 수익률이었다. 자일랜의 요즘 주가는 30달러선, 회사가치는 15억달러다.

나스닥이 잘 되는 이유는 자일랜처럼 투명하게 공개되는 기업회계.경영정보를 투자자들이 믿고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어떤 것인지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스닥을 본떠 우리도 코스닥을 만들었으나, 이제 결합재무제표를 만들고 회계법인.기업 간의 '먹이사슬' 을 끊고 투자자들이 경영정보를 제대로 읽어야 코스닥은 돌아간다.

M&A가 활발한 것도 기업이 얼마짜리인지 바로 알 수 있고 대주주든 근로자든 '내 회사' 라는 개념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멀쩡한 벤츠.크라이슬러가 합쳐 힘을 키우는데, 예컨대 대한항공.아시아나는 몹시 힘들면서도 합쳐 살 생각은 못한다.

이런 말도 들어 보자. "대만은 실리콘밸리에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에이서.TSMC 등 내로라 하는 기업들이 5천여만달러의 펀드를 모아 대만계 벤처캐피털인 인베스타에 넣었다. 투자수익보다 초기 테크놀로지를 잡으려는 것이다.

반면 한국 대기업들은 다들 따로 진출해 수억달러씩 들여 기존 기업을 샀고 실패도 컸다. 한국기업들의 수직적 의사결정이 늦어져 중고기술을 사고 뒷북을 치는 동안 수평적 네트워크의 대만기업들에는 제2의 인텔, 제3의 넷스케이프가 흘러간다. " (스탠퍼드 리서치 파크의 컨설팅회사 리 테크놀로지의 아이크 리 사장)

"직원 10여명에 사무실도 초라했던 95년, 한국의 S.H그룹 간부들과도 만났다. 그러나 S그룹측은 자기네 상표로 우리 제품을 팔아 줄 수도 있다고, H그룹측은 서류상으로 테크놀로지 개발의 근거를 보자고 어이없는 제의를 했다. 그들은 초라한 단계에서의 테크놀로지 잠재력을 초기에 잡아채지 못한다. " (김종훈 회장)

"동질 (同質) 의 인간들이 모여서는 벤처가 안된다.

동질적 가치관의 사회에서는 창의성이 나오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규범.규제를 풀고 개성을 살리는 교육을 해야 소프트웨어가 나온다. 실리콘밸리 성공의 으뜸 요인은 미국식 다원주의와 교육방식이다. " (실리콘밸리의 앰벡스 벤처그룹 이종문 회장) 미국에서 성공한 이들 한국인은 우리에게 절망이자 희망이다.

김수길〈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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