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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7> 언 강의 겨울 낚시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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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군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학교에서 가르치고 아이들이 열심히 불렀던 색다른 창가(唱歌)가 있었다. “♪나무베고 새끼꼬고 짚신을 삼아서 부모님 공양하고 아우를 돌보고 형제 사이좋게 효행을 다하니 우리가 배울 것은 니노미야 긴지로(二宮金次郞)….”

전시의 기름을 보급하기 위해 운동장을 모두 아주까리 밭으로 만든 교정 한구석에 그 노래의 주인공 니노미야 긴지로의 동상이 서 있었다. 등에는 나뭇짐을 지고 손에는 책을 들고 읽는 모습이 우리 또래 아이라고 하는데도 늙어 보였다.

‘바쿠단 상요시(爆彈三勇士)’, 구군신(九軍神) 그리고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처럼 천황을 위해 죽자는 세상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우애 있게 자라면서 열심히 책을 읽는 니노미야 긴지로는 분명 일본 사람인데도 이웃 동네 할아버지쯤으로 보였다. 더구나 그는 짚신과 관계가 깊다. 밤마다 짚신을 삼고 아침 일찍 그것을 팔아 푼돈을 모은다. 그렇게 시작해 몰락한 집안을 살리고 물건을 아껴 쓰는 법과 농사짓는 법을 개량하여 나중에는 기근으로 죽어가는 마을 전체를 일으켜 세웠다. ‘사쿠라마치’를 필두로 수십, 수백의 농촌을 빈곤과 게으름과 기근에서 구해낸 ‘니노미야’는 총칼이 아니고서도 영웅이 될 수 있는 길을 걸었다.

그의 농사법 개량과 수차(水車)와 제방을 쌓는 신기술, 그리고 고리대금을 하지 않고서도 돈을 당당하게 증식하는 그 모든 놀라운 절학들은 한 켤레 짚신, 한 권의 책에서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길가에서 다 해어진 짚신을 가슴에 안고 기도하는 할머니의 짚신 공양(供養)에서 큰 감명을 받는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네 몸을 해칠 때까지 나에게 바쳤으니 이제는 네가 나온 곳으로 돌아가거라. 그 논에서 퇴비가 되어 새 볏짚으로 자랐다가 다시 짚신이 되거든 또 함께 살자.” 할머니의 기원대로 짚신은 순환한다. 논에 버린 짚신은 다시 벼가 되어 자라고 그 벼는 짚을 남기고 죽는다. 짚은 새 신발로 태어났다가 닳게 되면 다시 죽어 논바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끝없는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발견하고 그 소모와 재생산의 되풀이에서 부를 얻는 니노미야의 마을 부흥의 정신이 생겨난다.

그리고 나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한 권의 책이 무엇인지 늘 궁금해 했지만 책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어린 나이에도 잘 알고 있었다.

뜰아랫방에는 신조사(新潮社)판 ‘세계 문학전집’ 36권 한 세트가 고스란히 서가 속에 꽂혀 있었고 형님들이 방학 때 읽다가 두고 간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등화관제 속에서 나는 전구에 검은 갓을 씌워놓고 몰래 그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일장기와 군가와 노기다이쇼(乃木大將)와는 다른 이야기들 그리고 일본 신들과는 또 다른 신들의 신화가 펼쳐진다. 그러다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나는 고본 책갈피 속에서 찢긴 노트장에 쓴 시 한 편을 발견했다.

“아 내 동생아 너를 운다/너 부디 죽지 말거라/ 막내둥이로 태어나 부모 정을 독차지한 너/ 부모님이 너에게 칼날 쥐어주고 사람 죽이라고 가르쳤으리요 /사람을 죽이고 죽으라고 스무 네 해 동안 너를 키웠으리요.” 좀 어려운 고전체로 쓴 시였지만 아들을 징용 보내고, 딸을 정신대에 보내고 장독대에서 몰래 숨어서 우는 여인네들과 같은 목소리였다. 교정을 아주까리 밭으로 갈아 엎어도 니노미야 긴지로의 동상이 서 있는 공터가 남듯이 아무리 등화관제로 칠흑 같은 어둠을 만들어도 찢어진 노트장 위의 시를 읽는 빛을 가리지 못하듯이(뒷날 나는 그것이 러일전쟁 때 쓴 여류시인 요사노 아키고의 반전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강은 얼어도 그 얼음장 밑으로는 따뜻한 물이 흐른다. 식민지 교실에서도 그렇게 배웠다. 간물의 비중은 섭씨 4도일 경우 제일 무겁다. 이 때문에 윗물은 빙점 하에서 쉽게 얼지만 그 바닥에 가라앉은 물은 얼지 않고 흐른다고. 겨울 낚시꾼처럼 식민지의 얼음장을 조금 뚫고 들여다보면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헤엄치고 있는 고기 떼들의 아가미가 보인다. 고기만이 아니라 숨 쉬고 움직이고 번식하는 작은 생물들이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문 채 초승달처럼 자라고 있다. 섭씨 4도 생명의 강바닥에는 한국인만이 아니라 “미나 미나 고로세(모두모두 죽여라)”라고 노래했던 짱꼴라 시나징(중국)도 있었고 고무나무가 있다는 열대의 남방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기치구 베이에이(鬼畜米英)”라고 불렀던 서양 사람들도 살고 있다. 알고 보면 일본 사람들도 니노미야 긴지로처럼 요사노 아키고처럼 얼음장 밑의 강물처럼 함께 흐르고 있었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세 가지 파랑새’입니다. joins.com/leeo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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