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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8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태호의 나간다 타령에 귀를 기울여보면, 훈련의 반복적인 담금질보다 선천적인 소질에 의존한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내로라하는 소리꾼으로부터 전수한 내력도 없어 보이는데, 마디마디 꺾일 때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호소력을 갖고 있었고, 전체적으로는 뭉클한 슬픔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가 대학동아리에서 풍무악을 익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인지도 몰랐다.변씨가 전직 고관의 아들이라고 넘겨짚었던 것도 허황된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철규의 뇌리를 스쳐갔을 뿐 회화성 (繪畵性) 까지 넘볼 만한 태호의 장타령은 땀을 흘리면서도 지칠 줄 몰랐다."나간다 나간다.

어디로 나가느냐 강원도 산나물로 나간다.화천땅 광덕산에 참나물과 모시대. 인제땅 점봉산에 누리대와 신선초. 인제땅 방태산에 병풍취와 곰취. 평창땅 개방산에 단풍취와 곤두레. 가평땅 명지산 취나물과 혼입나물. 양평땅 강하면에 고사리와 삽죽뿌리. 충청도 해미땅에 냉이나물. 응암땅에 달래나물. 용문산에 더덕나물. 가야산에 곰취나물. 해인사에 미나리. 양평땅에 두릅나물. 가평땅에 냉이쑥. 영월땅에 고사리. 나간다 나간다 강원도 산나물로 나간다.

먹는 나물에는 참자가 붙었고, 못 먹는 나물에는 개자가 붙었네. 달래, 냉이, 꽃다지, 민들레, 소루쟁이는 3월달에 무쳐 먹어야 맛이고. 원추리, 미역취, 고비, 혼입나물, 고사리는 4월달에 삶아 먹어야 맛인데. 잔대싹, 개암취, 모시대, 참나물, 우엉잎, 상추싹은 5월달에 먹어야 맛일세. 나간다 나간다 잘도 나다 안 나가면 지만 춥지. 움파, 산갓, 당귀싹, 미나리싹은 새콤달콤 무쳐 먹고. 냉이, 머위, 씀바귀, 달래는 초고추장에 담뿍 찍어 먹는데. 취나물, 고사리, 두릅은 양념장에 살짝살짝 버무리고. 냉이, 꽃다지, 지침개, 고들빼기는 된장국에 끓여 먹고. 참나리, 둥글레, 도라지, 쑥은 기름에 볶아 먹네. 나간다 나간다 산나물 타령으로 나간다.

안 나가면 지만 춥지. " 객실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걸어나와 좌판으로 모이기 시작하자, 철규는 서둘러 변씨와 봉환을 진부로 떠나 보냈다.다음 장날이 진부였기 때문이었다.

도회의 규격화된 식품에 견고하게 단련된 입맛에 신선한 토종의 맛을 보여주려는 그들의 의도가 당장 적중할지는 의문이었다.그러나 그들의 의식 밑바닥에 아련한 추억으로 잠재되어 있었던 산나물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데는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알고보면 서울 도심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대다수는 시골출신이라는 것을 겨냥했던 것인데, 그 예상이 적중한 것 같았다.늙바탕의 나이로 접어든 사람들이 먼저 와서 산나물을 꼼꼼하게 살피며 사기 시작하자, 젊은이들도 덩달아서 좌판으로 모여들어 멋도 모르고 좌판을 휩쓸어 거덜내다시피 하였다.군중심리와 충동구매가 한 좌판에서 궁합을 맞춘 결과였다.

해도 지기 전에 좌판은 바닥이 나렸다.좌판을 거두려는데, 휘닉스파크 들머리길 주변에서 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왔다.육류나 생선찌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식단을 봄철에는 산나물로 바꿔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계절적인 수요에 불과하겠지만, 일테면 식당을 경영하는 사람들에게서도 관심을 끌 수 있었던 하루였다.좌판채비들을 정리한 두 사람은 근처의 식당으로 찾아들었다.정기적으로 산나물을 공급해 주겠다는 약속만 한다면, 공짜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식당주인이 나섰기 때문이었다.도랑 치고 가재 잡는 횡재를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덤으로 내주는 두 그릇째의 밥그릇을 비우고 있는 태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철규가 궁금했던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그런데…. 태호의 나간다 타령 중에서 꼼꼼하게 분석해 보아도 도대체 해답이 나오지 않는 대목 하나가 있어. 그게 뭔지 알어?" "알고 있어요. 나간다 나간다 안 나가면 지만 춥지 그거죠? 왜 묻지 않나 했었죠. " "알고 있었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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