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유행-그 겉과 속]웃음사이 비치는 뒤틀린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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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패러디는 가볍다. '에일리언 5' 는 잘해봤자 '에일리언' 의 본전치기겠지만 패러디는 오히려 원작으로부터 일정량의 재미를 보장받는다.

원본을 떠올려 비교하며 웃게 되는 메커니즘 때문이다.

가벼워서 넘쳐나지만 임무는 만만치 않다.

'꼬집기' 와 '가려운 데 긁기' .살짝 비트는 풍자의 맛이 살아나지 않으면 그야말로 서투른 모방으로 전락한다.

요즘 제일 잘 나간다는 '송강호 패러디' 를 보자. 지난해 관객 30만을 동원한 영화 '넘버 3' 에서 불사파 두목 조필역을 했던 그의 더듬거리는 말투를 흉내내 사방에서 "배신이야 배신" 을 외친다.

대학 개강 후 동아리 홍보물에 가장 많이 등장한 문구도 "여기 안 들어오면 배배배배, 배신이야!" 였다고. PC통신 유머란에 '헝그리 정신' '무대뽀 정신' 등을 이용, 다양한 패러디가 올라와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왜 하필 '송강호 패러디' 일까. 비디오 출시나 휴대폰 광고출연 등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권위의식에 대한 빈정거림이 제대로 먹혔다는 게 맞을 거다.

불사파는 군사문화의 축소집약판이다.

"현정화는 라면만 먹고도 금메달 땄어!" 라는 그릇된 정보를 "임춘앱니다, 형님" 하고 바로잡으려 하면 돌아오는 건 주먹뿐이다.

형님이 "하늘색깔이 빨간색!

하면 그때부터 무조건 빨간색" 인 거다.

권위주의를 배격하자면서도 아직도 구석구석 '무대뽀 식' 이 횡행하는 현실을 풍자한 거라고나 할까. 개그우먼 이경실의 '장미희 패러디' 도 아주 예리하다.

한때 대종상 시상식때 영화배우 장미희의 '아름다운 밤입니다…' 를 흉내내 눈물콧물을 뽑아내던 그는 요즘 "똑 (떡) 사세요~" 를 외치느라 정신없다.

MBC 드라마 '육남매' 에서 어머니 역으로 나오는 장미희의 콧소리를 따라하는 것. 장씨는 창백한 피부에 땟국물 흐르는 시대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우아하고 가녀린 목소리로 "극의 리얼리티를 떨어뜨린다" 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이씨의 개그는 때로 거부감을 자아내는 장씨의 '기품' 이 이 드라마에 어울리지 않음을 비꼬는 효과를 거둔다.

'IMF 구제금융체제' 라는 시대상황에 맞물려 '복고풍 패러디' 광고도 옛 풍경을 통해 현실을 깨닫게 한다.

탤런트 전원주가 과감한 텀블링.달리기 연기를 선보여 화제가 된 '국제전화 002' CF가 대표적. 여기엔 60년대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의 아이 목소리, 70년대 만화영화 '짱가' 의 주제가에 촌티가 줄줄 흐르는 복장까지 골고루 나온다.

"그때 그 시절은 저랬구나" 하며 낄낄대고 웃지만 기실 지금 우리 형편과 다른 것은 별로 없다.

오히려 눈만 잔뜩 높아져 불필요한 거품을 뽑아내기가 더욱 힘들 뿐. 복고풍 패러디는 향수를 자극하다 씁쓸한 뒷맛을 남겨놓고 슬그머니 사라진다. 패러디 (parody) 라는 단어엔 풍자와 모방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삐끗하면 어설픈 흉내내기지만 잘하면 재미도 있고 의미도 깊다.

영화.소설의 별 의미 없는 패러디가 TV에 난무하는 '패러디의 춘추전국시대' 에 후추처럼 톡 쏘는 매운 몇몇 패러디들의 존재는 그래서 소중하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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