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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러시아 발틱함대에 압승…대한제국 명운도 함께 끊어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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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1905년 5월 27일, 7개월에 걸친 오랜 항해로 지칠 대로 지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대마(對馬)해협에 모습을 나타냈다. 일본의 연합함대 전력은 러시아에 비해 월등했다. 사격 속도와 명중률은 3배나 앞섰고 포탄의 파괴력도 2배나 컸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郎) 제독은 그날 해전 중에 축배를 들 만큼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다. 패주하던 러시아 함대는 다음 날 독도 앞바다에서 항복하였다. 러일전쟁은 그때 이미 일본의 승리로 굳어졌다. 모항으로 개선하는 연합함대(사진)의 모습에서 제국의 반열에 오른 일본의 위세가 느껴진다. 서구열강의 침략에 시달리던 중국의 쑨원(孫文)과 인도의 네루를 비롯한 약소 민족 지도자들은 당대 최강의 육군 전력을 보유한 러시아가 작은 섬나라에 무릎을 꿇었다는 역설에 열광했다.

인종주의 입장에서 세상을 본 우리 지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일전쟁 이후 이 땅의 대다수 지식인은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황인종 모두를 동포로 보는 ‘인종주의적 아시아 연대론’에 기울어져 있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나 연해주에서 민족운동을 주도했던 정성만조차도 러일전쟁 개전 초기에 일본 부상병 치료를 위한 적십자사를 만들려다 옥고를 치를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의 승리가 가시화되고 망국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자, 그들은 인종주의에 입각한 동양주의가 파놓은 함정을 알아챘다. 윤치호는 이율배반의 묘한 감정을 6월 2일자 일기에서 토로했다. “황인종으로서 한국은-더 정확히 말해서 나는-일본의 영광스런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일본은 황인종의 명예를 옹호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나는 일본의 잇따른 승리에 대하여 좋아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모든 승리는 한국 독립의 관(棺)에 가한 못질이다.”

9월 5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주선으로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이 맺어졌다. 러일전쟁 중에 맺어진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제2차 영·일동맹, 그리고 러·일 강화조약. 일본은 한국 지배를 영국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모두에서 인정받았다. 영국과 미국은 자기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해양세력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1905년 11월 외교권을 강제로 앗아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대한제국의 정수리를 겨눈 ‘다모클레스의 칼(Sword of Damocles)’을 붙잡아 맸던 한 올의 실은 끊어지고 말았다. 윤치호가 내다본 대로 재앙은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힘의 균형 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연명하던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세기 말 서세동점기, 20세기 중반 냉전체제 형성기, 그리고 북한의 거듭된 핵실험으로 동아시아 정세가 요동치는 오늘의 포스트 탈냉전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 지속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징은 주변국의 이해가 엇갈리는 세력 각축장이라는 점이다. 속내를 감추고 다시 한번 동아시아의 패자를 꿈꾸는 일본은 지금 자주를 말하지 않는다. 동북공정이 상징하듯 중국도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악몽을 다시 꾸지 않으려 한다. 한 세기 전 이해를 놓고 열강들이 편을 가르던 시절, 우리는 남의 힘에 기대 살아남으려다 나라를 앗기고 말았다. 외세에 기대 명맥을 유지하려 했던 조선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제국과 이해와 행동을 같이하는 친제국은 종속을 잉태한다. 그러나 타협이 곧 종속이 되며, 저항은 자주라는 소박한 등식에서는 놓여나야 하지 않을까? 한 세기 전 실패의 역사가 우리의 앞길을 비추는 등대로 다가서는 오늘. 구한말의 아픈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타는 목마름으로 우리의 활로를 열어줄 리더십을 갈망한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