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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율스러운 클라이맥스, 역시 김혜자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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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봉준호 감독은 “김혜자라는 배우가 없었다면 ‘마더’는 아예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연기의 신’과 함께 했던 5개월을 추억했다. 그는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클라이맥스 장면을 찍은 날, 현상소에 필름을 보낸 뒤 혹시 현상 사고가 나 그 장면을 못 쓰게 될까봐 밤에 한숨도 못 잤다”며 웃었다. [안성식 기자]

모든 건 그러니까 김혜자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봉준호(40) 감독은 탤런트 김혜자의 '광팬'이었다. 한 때는 김혜자의 대표작 '전원일기'의 양촌리 김회장댁 부인 이름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김혜자가 최불암과 부부로 전 국민에게 이름을 날린 건 '전원일기'가 처음이 아니라 방송 시간이 되면 전국의 수도계량기가 멈춘다는 농담이 돌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MBC 일일연속극 '당신'(1978)이었고, 거기서 최불암의 배역이 자신과 성이 같은 '봉과장'이었다는 사실도 그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5년 전 TV에 나온 김혜자를 보면서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30년 가까이 한국의 인자한 어머니를 연기해온 저 관록의 배우에게 '국민엄마'라는 호칭은 영광이면서도 혹시 십자가는 아니었을까? '국민엄마' 김혜자가 아들 때문에 극한 상황에 몰려 광기와 히스테리를 보여준다면 어떨까? 어쩌면 연기자로서는 신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는 저 배우도 이런 발상의 대전환을 내심 바라고 있지 않을까.

그가 28일 개봉하는 영화 '마더'를 만들게 된 연유는 이랬다. '마더'는 여학생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다소 모자라는 아들 도준(원빈)을 구하기 위해 극단적 선택의 딜레마에 놓이게 되는 엄마 혜자의 이야기다. 그 야수와 같이 휘몰아치는 모정에, 그 원초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머리로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엄마라는 존재의 이유는 자식이고, 모든 엄마에게 자식은 우주라는 사실을 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끄집어내오는 '마더'의 폭발력은 초강력 다이너마이트급이다.

2006년 1300만 흥행 신화를 쓴 블록버스터 '괴물'의 다음 작품으로 "누구나 갖고 있고 누구나 할 이야기가 많은 존재"인 엄마 이야기를 택한 그를 21일 만났다. '마더'는 이날 폐막한 제62회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돼 '칸이 경쟁 부문에 '마더'를 초청하지 않은 것은 부당하다'(미국 연예전문지 '버라이어티')등의 호평을 받았다.

-왜 엄마인가.

"원래 서로 안 어울리는 것들끼리 짝지어 놓고 충돌시키는 걸 좋아한다. '살인의 추억'은 '농촌 스릴러'였고, '괴물'은 한강에서 벌쭘하게도 괴물이 나오는 얘기였듯이. 엄마와 살인사건, 엄마와 섹스도 너무 불편하고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숭고한 엄마와 야수 같은 엄마 두 면모를 모두 보여주고 싶었다. 가장 숭고한 사랑인데 어느 선을 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광기가 되는 거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갔기 때문에 기존의 엄마 이야기들과 차별화가 된 게 아닐까 싶다."

-왜 엄마와 아들은 그렇게 원초적일까.

"열 달 간의 동거기간 때문일 거다. 한 몸에 있던 이성관계니까. 김기덕 감독 식으로 표현하자면 남녀의 섹스는 성기가 질 속으로 들어가는 건데,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엄마의 질과 자궁을 거쳐서 나오니, 이 얼마나 원초적인 관계인가. 김혜자 선생님은 영화를 보고 나더니 '도준이 엄마는 짐승 같아'라고 했다. 자기 새끼를 건드리면 무섭게 덤벼들어 할퀴어버리는 야수 말이다."

“우리 아들은 물방개 한 마리도 못 죽여요.” 엄마 의 사랑은 야수의 그것처럼 원초적이다.


-'마더'는 '연기의 신' 김혜자에게도 더 깊어질 수 있는 구석이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살인의 추억'(2003) 때 송강호가 캐스팅이 되지 않았다면 이 영화를 찍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똑같은 얘기가 이번에도 적용되나.

"김선생님의 존재는 더 절대적이다. 그가 없었다면 '마더'는 아예 시작되지도 않았을테니까."

-김혜자는 '다른 감독들은 그냥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하는데 봉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게 나올 때까지 계속 찍고 또 찍었다'고 말하던데.

"사실 특별한 요청이 필요 없는 연기자 아닌가. 혜자가 공변호사에게 절절 매면서 쫓아가는 뷔페 식당 장면을 18번 찍었다. 워낙 그 샷 자체가 한 번에 찍기 힘든 복잡한 샷이었다. 그런데 김선생님은 '내 연기가 마음에 안 드는데 엑스트라 핑계 대고 자꾸 찍는구나' 오해했다. 그만큼 배우로서 예민하다. 클라이맥스 장면은 네 번쯤 찍는데 온 몸에 전율이 왔다. 김선생님이 '다시 찍을까?'하는데 내가 단호하게 '절대로 다시 찍고 싶지 않습니다'하고 카메라를 치우라고 했다. 김선생님은 그것도 오해했다. 나중에 오더니 '봉감독이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거 처음 봤어,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길래…' 하는 거다. 나는 너무나 신성하고 절대적인 장면이라 훼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데.(웃음) 필름을 현상소에 보내놓고 혹시 사고가 나 그 장면을 못 쓰게 될까봐 그날 밤 한숨도 못 잤다. '살인의 추억'때 현상사고가 나서 못 쓰게 된 장면이 있었는데, 사실 그 장면은 찍어놓고도 너무 마음에 안 들었었다. 사고가 났다고 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한 장면을 30번 찍기도 했다. NG 때문이 아니라 서로 고민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혜자가 갈대밭에서 춤 추는 첫 장면과 관광버스에서 다른 여자들과 어울려 춤 추는 마지막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다.

"칸 영화제 기자회견에서도 질문이 쏟아졌다. 외국인들에게는 관광버스 문화가 전혀 생소할테니까. 내가 원래 우리나라만 갖고 있는 기묘한, 엽기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관광버스 춤 장면은 고등학생 때 오대산으로 수학여행 갔을 때의 기억이 바탕이 됐다. 나는 그걸 '오대산의 쇼크'라고 부르는데(웃음), 국립공원 앞 관광버스에서 아주머니들이 내리지도 않고 한 시간을 춤만 췄다. 정말 기괴했다. 어린 마음에 좀 추하다고 생각했다. 첫 장면은 끔찍한 일을 겪고 난 혜자가 반미치광이 상태라는 걸 보여준다. '미친년 꽃다발' 이런 느낌이다. 음악을 먼저 만든 게 아니라 라틴댄스 음악을 틀고 촬영을 한 뒤 나중에 이병우 감독이 음악을 입혔다."

-혜자가 "우리 아들은 물방개 한 마리도 못 죽여요" 하는 대사가 웃겼다. 왜 개미가 아니라 물방개인가.

"글쎄, 사람들이 많이 물어보더라. 그냥 김선생님 입에서 물방개라는 말이 나오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도준이 석방되고 대신 붙잡힌 종팔이를 혜자가 찾아가 '엄마 없어?'하고 물어보는 장면이 참 섬뜩했다.

"혜자가 처한 고통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었다. 혜자는 도준이가 풀려날 때 마중을 가지 않는다. 그게 종팔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을 것이다."

-외신 평에 '히치콕 스릴러를 연상시킨다'는 내용이 있던데.

"히치콕은 내 역할모델 같은 분이니까 그런 평은 당연히 기분이 좋다. 중후반의 현악기 음악이 히치콕 음악을 도맡았던 버나드 허먼을 떠올린다는 내용이었다."

-살인사건을 둘러싼 경찰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 '살인의 추억'을 떠올릴 사람들이 많을 듯하다. 범행 재연이나 도준의 입에 사과 물리고 형사가 세팍타크로를 하는 장면을 보면 이번에도 공권력의 무능함을 짚고 넘어간 것 같기도 하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살인의 추억'을 의식하면서 즐겁게 썼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어떻게 변주할까…. 그런데 경찰들은 이번에는 상당히 나이스하게 그려졌는데. 나름 친절하고 수사도 열심히 하지 않는가."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엄마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밤 시사회에 어머니가 오신다. 어머니는 나의 최후의, 궁극의 관객이다. 아, 너무 긴장된다."

-어떤 어머니인가.

"막내를 늘 걱정하는 노심초사형이다. (성공했다고) 길에서 너무 웃고 다니지 말아라, 항상 겸손해라 얘기하는."

-'괴물' 이후 아직도 '1300만'이라는 숫자가 머릿 속에 있는지.

"아련한 추억이다. 빨리 누군가가 그 기록 좀 깼으면 좋겠다. '역대 한국영화 사상 박스오피스 1위' 이런 수식어가 내 이름 앞에 붙는 게 싫다. 작품을 할 때 나는 한 번도 쉽게 가려고 한 적이 없다. 최소한 안전일변도로 가려는 시도를 한 적은 없다고 자부했다. 이제 '괴물'의 감독이 아니라 '마더'의 감독이 됐으면 좋겠고, 2012년에는 '설국열차'의 감독으로 불렸으면 좋겠다.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이 내 기록을 깨주면 좋겠다.(웃음)"

기선민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봉준호는=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해 ‘살인의 추억’(2003)으로 스타 감독이 됐다. 2006년 블록버스터 ‘괴물’로 1300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신화를 썼다. ‘마더’로 제62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돼 “칸이 경쟁 부문에 ‘마더’를 올리지 않은 것은 부당하다”는 해외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현재 프랑스 만화 원작의 SF ‘설국열차’를 준비하고 있다. 영화인들이 차기작을 가장 궁금해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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