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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외부 세력에 사법부 운명 맡길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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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우려하던 대로 사법부 밖에서의 ‘사법부 흔들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어제 “신영철 대법관에 대한 탄핵 발의를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스스로 물러날 사람은 신영철 대법관이 아니라 뒤에 앉아서 부채질하고 있는 박시환 대법관”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서청원 대표 등 친박연대 의원들에 대한 대법원 재판이 진행 중이던 지난 3월 대법원 고위 간부가 친박연대 측에 “신 대법관의 재판 개입 논란에 관해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며 ‘법원의 정치 개입’ 의혹까지 제기했다. 이제 ‘신영철 파문’은 재판권 독립을 둘러싼 사법부 내 논란에서 완전히 정치적 이슈로 변질돼 버렸다. 좌·우파 시민단체에 정당까지 나서서 압력을 넣고 개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박시환 대법관의 적절치 못한 발언은 사태의 정치화를 자초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신문 인터뷰에서 지금을 ‘5차 사법파동’이라고 하고, 절차와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사법부 내 견해에 대해서도 “4·19와 6월항쟁도 절차와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강변했다. 사태를 논의한 대법관회의 분위기에 대해 “다들 동료 대법관 문제라서 추상적으로만 얘기했다. 실망스러웠다”며 다른 대법관들까지 비난했다. 과연 대법관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인지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지금이 혁명기라도 된다는 말인가.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신 대법관은 물론, 이용훈 대법원장을 비롯한 법원 수뇌부와 각급 법원 판사들의 적절하지 못한 대응이 사법부를 외부 세력의 각축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법부의 독립은 법관의 신분 보장을 주축으로 하는 ‘인적 독립’과 외부 세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물적 독립’으로 나뉜다. 한편으로 신분을 철저히 보장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회·행정부, 사회 제반 세력의 압력·여론몰이로부터 자유로워야 독립이 가능하다. ‘헌법·법률·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조항의 ‘양심’도 법관 개인의 이념·성향이 아니라 ‘법관으로서의 직업적 양심’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법관으로서의 양심이 충돌할 경우에는 법관으로서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고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것이다. 저간의 절차를 무시하고 집단행동으로 대법관 사퇴를 압박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면서 사법부 독립을 운운한다면 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사법부는 사태를 사법부 내부에서 수습해야 한다. 민주당이 탄핵안 발의 요건을 충족한다 하더라도, 만약 여당이 또 다른 탄핵카드로 맞불을 놓으면 어찌할 건가. 이래저래 사법부만 중간에서 골병이 들 뿐이다. 그동안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일관한 이용훈 대법원장의 책임이 매우 크다. 세상에는 선한 의도가 나쁜 결과를 빚는 일이 허다하다. 우리는 사법부가 그 같은 선례를 남기지 말 것을 충심으로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