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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문화보기]춤추는 문화…정권따라 오락가락 자존심 어디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근대사의 정치 판도를 바꾼 두 사람,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모두 이방인 출신이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에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변방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의 복잡미묘한 성격을 두고 볼 때, 출생성분의 열등감이 중요한 기질로 작용했음을 엿볼 수 있다.

두 사람의 공통된 야망은 세계제패였고, 이들의 오만이 불러온 대가는 똑같이 비극적이었다.

한때, 프랑스 소시민들은 자유의 횃불을 쳐들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을 낭만주의적 혁명가로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일상에서의 나폴레옹은 냉철한 직업군인이었으며, 미술이나 어학보다는 수학과 역사에 몰두했다.

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천재적 전술을 구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예술은 단지 미적 관념의 위대성과 실용성에 관한 문제로 이해될 뿐이었다.

그에 비해서 젊은 히틀러는 미술학교에 두번 응시했다가 모두 낙방한 경험이 있었다.

그 이유로 '데생시험 불가' 라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화가로서 전혀 재능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또한 희곡을 썼고 극장 박물관의 설계도를 만들었고 밥을 먹기 위해서 그림엽서를 제작했으며 극장 간판을 그렸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는 두 사람의 문화적 취향만큼이나 상반된 기복으로 남아있다.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길에 올랐다.

군사적으로 무모한 결정이었고, 1년이라는 짧은 기간밖에는 이집트를 정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함께 데려간 1백75명의 '박식한 민간인' 학자들과 미술가들에 의해 파라오의 나라는 영원히 점령되었다.

그뿐 아니라 당시 발견된 로제타 스톤이 해독됨으로써 나폴레옹은 고대 이집트를 잠에서 깨워 현대 의식 속에 소생시킨 영웅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문화적으로 추앙받는 반면에, 자칭 문화적이었던 히틀러는 예술품들에 대한 청소작업을 단행했다.

현대미술품들을 철거하고 타오르는 책더미를 바라보며 만족했다.

결국 예술을 도구로 지배하려던 그는 패권주의적 깡패라는 이미지와 함께 세계사의 치욕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나폴레옹이 프랑스 특유의 시민정신과 정치상황 속에서 '문화 수호자' 로 다시 태어났다는 점이다.

프랑스도 우리 나라만큼이나 외적의 침입이 많았다.

그때마다 비상한 재생력을 발휘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항상 돌파구를 만들어준 것은 문화를 존중하고 지키는 자존심이었다.

그런 정신이 예술이 번영할 수 있는 토양과 분위기를 조성하고 '감미롭고 아름다운 프랑스' 라는 명성을 키웠으며, 단순히 관광객뿐만 아니라 외국의 작가나 예술가들 마음까지 끌어들이는 매력을 발산한 것이다.

굳이 프랑스의 경우를 들지 않더라도, 문화 존중의 자존심이야말로 어려움에 처한 나라가 활로를 트는 기본 토양이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좌지우지할 장식물이 아니다.

그런데 왜일까. 우리 나라의 문화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우왕좌왕 춤을 춘다. 문화부를 문체부로 끌고 가더니 이제 문관부 (문화관광부)가 됐다.

'문화대통령' 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도 큰 지금, 문화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김미진

〈필자 소개〉

새 칼럼의 필자 김미진씨는 1962년생으로 미국 '매릴랜드 인스티튜트 칼리지 오브 아트' 를 졸업했다.

볼티모어 33미술학교 객원교수, 시 (市) 문화예술자문위원, 한성대 강사를 거쳐 현재 단국대에 출강중. '아이소스 투 사우스 수상작품전' '소리의 풍경전' 등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졌으며, 소설작품으로 '모짜르트가 살아있다면' '우리는 호텔 캘리포니아로 간다' 등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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